반응형 [영상 & 유투브]210 [병자호란7] 청 기병의 진격의 속도전 [병자호란7] 청 기병의 진격의 속도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당당했던 인조에게 최명길이 한마디 한다. “곧 겨울이 되면 강이 얼텐데, 그러면 저들의 기병이 쉽게 우리 땅에 들어오려고 할텐데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보낸 문서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치 어떻게 너희를 구해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구원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전쟁의 책임은 근자감으로 깐.. 2021. 5. 18. [병자호란6] 청 태종, 조선을 침략하다. [병자호란6] 청 태종, 조선을 침략하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1619년 명나라와 조선이 사르후 전투에서 x박살났다. 사르후 전투에 군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나름 중립외교를 폈던 광해군(1608~1623)이 1623년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고, 이듬해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 평안도의 방어선이 약화된다. 후금은 지속적으로 산해관을 뚫으려고 하다가 1626년에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의 원숭환(1584~1630)에게 누르하치가 패하고 죽게되자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이듬해인 1627년에 후금이 조선을 공격한다(정묘호란). 이때 한양까지 점령당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튀었으며, 결과적으로 ‘정묘화약’을 통해 후금은 물러간다. 후금은 조선에게.. 2021. 5. 18. [대한민국수립1] 미국의 원폭 두 방이 우리를 독립시켰다? [대한민국수립1] 미국의 원폭 두 방이 우리를 독립시켰다? 독립(獨立)은 ‘혼자 섰다’는 뜻이어서 1945년 이후 남과 북이 분단된 상황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독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좀 마음에 린다. 진정한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이라는 단어가 나을 것 같다. 1945년 해방 이전의 상황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됨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 1945년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됨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만약 2차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을까? 2차 대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더라도 우리는 계속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고, (시기적으로 늦을.. 2021. 5. 14. [병자호란5] 정묘호란-웃픈역사가 재밌다? [병자호란5] 정묘호란-웃픈역사가 재밌다? 후금의 아민(1585~1640)이 3만 병력을 거느리고 심양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 정주, 안주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향한다. 당시 평안도 병마사 남이흥 장군은 안주성에서 죽었고, 평양을 지키던 평안도 관찰사 윤훤(1573~1627)은 도망쳤다. 인조는 장만(1566~1627) 장군을 도원수로 삼고 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아서 황해도를 지키게 한다. 이때 황해도의 평산이 1차 방어선이고 2차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다. 장만은 출병할 때 당시 훈련도감에서 뛰어난 조총수 100명을 내어달라고 있지만 인조가 거절한다. (자신이 강화도로 가기 때문에 자기를 지켜야 한다고)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면서 소현세자에게 남쪽으로 가서 의병을 모으라고 시킨다. 임진왜란.. 2021. 5. 13. [병자호란4] 이것이 정묘호란이다.(옷에서 잡음이ㅠ) [병자호란4] 이것이 정묘호란이다.(옷에서 잡음이ㅠ)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자(1616년) 명나라는 후금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해서여진의 예허부와 조선과 함께 후금을 공격하였다(1619년, 사르후 전투).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하면서 만주(요동과 요서)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의 군주는 광해군(1608~1623)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려고 했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임진왜란(1592년) 당시에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니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당시 상황으로 파병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비변사 뿐만 아니라 삼사의 젊은 관료들까지 나서서 파병을 해야 .. 2021. 5. 12. [병자호란3] 영원성전투(누르하치vs원숭환) 그리고 드디어(?) 정묘호란 [병자호란3] 영원성전투(누르하치vs원숭환) 그리고 드디어(?) 정묘호란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1619년에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요동은 물론 요서지방도 장악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수도를 허투알라에서 요양으로, 그리고 심양으로 옮기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착실하게 다져갔다... (무슨 개가 영역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예전에 금나라를 세웠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도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었다. 이때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를 장악한 후금이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의 가장 중요한 관문인 ‘산해관’을 지키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산해관은 웅정필(1569~1625)이라는 사람이 나름 잘 지키고 있었는데 왕화정이라는 멍청한 부하 때문에 제거되었다... 2021. 5. 12. [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1619년 사르후전투는 동북아의 역사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였는데, 그 이전인 1615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황제의 마음은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들었다. 그러나 명은 예허를 도왔고 우리 백성의 벼 수확을 못하게 한다. 묻노니 바야흐로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하지만 어떤 성에도 1만의 병사를 주둔시키지 못할 터, 만일 1천의 병사만을 주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누르하치는 이전부터 야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예허여진’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만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만.. 2021. 5. 11. [병자호란1] 누 르 하 치 (17분 순삭ver.) [병자호란1] 누 르 하 치 (17분 순삭ver.) 누르하치가 어떻게 만주를 통일하였는가? 누르하치는 솔직히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보다 뛰어난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입장에서는 항상 북방민족이 두려운 존재였다. 만주의 여진족이나 예맥족은 ‘반농반목’(半農半牧)을 하였다. 과거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였는데, 이후 몽골의 테무친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송까지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였다(원나라, 1271~1388). 이때 원나라 치하에서 한족은 가장 하층민 취급을 당하였다. 100년 동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한족은 주원장이 등장해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이때 쫓겨 올라간 몽골족은 북원을 건국하고 언젠가 다시 중원으로 진출하.. 2021. 5. 11. [이덕일의 한국통사] 은나라 사람 기자가 고려와 조선의 중화사대주의로 인해 단군을 이은 정통으로 보고 평양에 묘를 만들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은나라 사람 기자가 고려와 조선의 중화사대주의로 인해 단군을 이은 정통으로 보고 평양에 묘를 만들다 기자조선에 대해서 많은 조선의 유학자들은 단군과 기자는 정통으로 인정하고 위만은 찬혁자가 반란자라고 보았다. 이것은 조선의 중화 사대주의 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중국 은나라에서 왔다고 돼어 있기 때문에 중국 은나라에서 온 기자는 우리 정통으로 봐도 되겠다는 것도 일종의 중화 사대주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은나라의 시조가 설(契)인데,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이 세 여성과 함께 목욕하러 가다가 현조(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고 하는 ‘난생사화’로 전해진다. 이 난생사화는 동이족의 전통사화이다. 오늘날 은나라가 동이족 국가라고 하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2021. 5. 10. [이덕일의 한국통사]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본 고조선 강역과 한사군 위치는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중국 역사서를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본 고조선 강역과 한사군 위치는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중국 역사서를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의 강역도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상당히 오랜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1) 우선 우리 역사는 반도내에서 이루어졌다는 반도사관에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평양과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에 있던 작은 소국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이고, 해방 이후에 국사학계의 태두라고 하는 이병도 박사가 주장을 하면서 남한의 강단사학에서는 고조선이 평안남도에 있던 작은 소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반면 과거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공부를 했던 분들은 고조선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까지 뻗쳐있던 강력한 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식민.. 2021. 5. 8.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2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