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3] 영원성전투(누르하치vs원숭환) 그리고 드디어(?) 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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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3] 영원성전투(누르하치vs원숭환) 그리고 드디어(?) 정묘호란

by [수호천사] 202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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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3] 영원성전투(누르하치vs원숭환) 그리고 드디어(?) 정묘호란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1619년에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요동은 물론 요서지방도 장악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수도를 허투알라에서 요양으로, 그리고 심양으로 옮기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착실하게 다져갔다... (무슨 개가 영역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예전에 금나라를 세웠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도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었다.

 

 

이때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를 장악한 후금이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의 가장 중요한 관문인 ‘산해관’을 지키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산해관은 웅정필(1569~1625)이라는 사람이 나름 잘 지키고 있었는데 왕화정이라는 멍청한 부하 때문에 제거되었다. (당시 중앙의 조정 대신들은 요동지역의 군벌이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산해관을 지키는 사람은 여진족뿐만 아니라 명나라 조정도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산해관을 지키겠다고 나선 사람이 원숭환(1584~1630)이라는 사람이다. 원숭환은 산해관 앞에 전진기지를 만들어 놓고 방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의 권력은 환관 위충현(1568~1627)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위충현에게 뇌물을 바친 고제라는 사람이 산해관의 책임자가 되면서 원숭환은 넘버2’ 신세가 되었다. 고제는 산해관만 지키려고 하였고 원숭환은 영원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원숭환은 포르투갈에서 들어온 홍이표를 영원성에 장착하고 소수의 병력으로 지키게 된다.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하였는데, 패하게 되었고(영원성 전투, 1626), 영원성 전투 이후에 누르하치는 숨을 거둔다(화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누르하치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할 때 가장 큰 도움이 된 인물은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1564~1611)였는데, 슈르하치가 홀로서기를 모색하였다는 이유로 누르하치에게 제거된다. (조선에서는 누르하치를 노추(奴酋), 슈르하치를(小酋)라고 불렀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자신의 큰 아들인 아이신교로 처영(1580~1615)도 죽여버린다.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누르하치의 2남인 아이신교로 다이샨(1583~1648)은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그리하여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슈르하치의 2남 아민이 조선에 쳐들어 온 것이 정묘호란’(1627)이다.

 

홍타이지가 왕이 되었지만 후금의 상황은 경제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명나라가 무역폐쇄의 경제조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의 모문룡(1576~1629)이라는 자가 요동지역의 패잔병을 모아서 조선으로 넘어와 있었다. 그가 평안도에서 양아치짓을 하고 있을때 광해군이 모문룡 일당을 가도라는 섬에서 지내라고 하였다. 모문룡은 가도에서 나름 수군을 양성하였는데, 쌀이 없어서 평안도 철산 지역에서 둔전(군대의 경비, 군량미를 마련하기 휘애 경작하는 토지)를 경작하려고 하는 걸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 인조가 왕이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명나라가 인조를 2년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인조는 나름 모문룡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그래서 인조는 광해군이 금지한 철산에서의 둔전을 허락하였다. 평안도로 나온 명나라의 패잔병들은 다시 양아치 행동(방화, 약탈)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당시 의주 부윤이었던 이순신의 친조카(형의 아들)인 이완(1579~1627)이 그들을 잡아서 매질을 하였고, 모문룡이 조선의 조정에 항의해서 이완이 직함이 강등되기도 한다. 모문룡은 조선에 1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다. 실제로 후금이 모문룡을 잡으려고 5천의 병력을 보냈을 때 모문룡은 조선옷을 입고 도망쳤던 놈이다.

 

정묘호란(1627)의 배경으로는 조선의 친명배금정책’, ‘모문룡의 가도 주둔이 빌미가 되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이 왕으로 즉위했는데 경제적으로 조금 힘든 상황이라 조선을 침략해서 약탈을 좀 하려는 의도가 있었고(경제적 이유), 인조가 친명배금정책을 편 것이 못마땅했으며, 이괄의 난 때 요동으로 도망친 이괄이 부하들이 길안내를 하겠다고 하였고,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 방어선이 약화되었음) 모문룡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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