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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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by [수호천사] 2021.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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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2] 사르후 전투 - 동북아 패권 쟁탈전

 

 

1619년 사르후전투는 동북아의 역사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였는데, 그 이전인 1615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황제의 마음은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들었다. 그러나 명은 예허를 도왔고 우리 백성의 벼 수확을 못하게 한다. 묻노니 바야흐로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하지만 어떤 성에도 1만의 병사를 주둔시키지 못할 터, 만일 1천의 병사만을 주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누르하치는 이전부터 야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예허여진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만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만주문자를 창제(1599)하였는데 이것은 후금을 건국(1616)하기 훨씬 이전이기 때문에 주체적인 힘을 기르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누르하치는 무순에서 항복한 이영방에게 자신의 손녀딸을 주고 손녀 사위로 삼는다. 이후 이영방의 후손들은 청나라에서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된다. 누르하치는 몽골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몽골의 강력한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몽골족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무순을 점령한 이후에 성을 부수고 무순 주민을 데리고 수도인 허투알라로 돌아왔다. 이때 명나라의 총병 장승흠이 1만의 병력으로 누르하치를 추격하였는데, 모래바람이 장승흠쪽으로 불게 되었고 누르하치의 기병에 의해서 전멸당하고 만다.

 

결국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르기 위해서 10만의 병력을 준비한다. 그런데 이전에 조선에 파병(임진왜란)하고 황제 만력제가 재정을 함부로 썼기 때문에 재정이 엉망인 상황이었고 10만의 병력도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강홍립이 18,000(혹은 13,000)을 파병하였고, 해서여진의 예허부도 1~2만 병력이 합류하기로 약속해서 약 13만의 병력을 모은 셈이다. 이에 비해서 누르하치는 8기군의 6만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 총사령관은 양호(?~1629)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왔던 장군으로 가토가 지키고 있던 울산왜성을 공격하는데 참전했던 장군이다. 양호는 10만의 병력을 4개로 나누어 금나라의 수도 근처인 사르후로 집결하기로 한다. 북쪽에서 마림이, 서쪽에서는 두송이, 남쪽에서는 이여백(1553~1620), 동쪽에서는 유정(1558~1619)이 강홍립과 합류하여 사르후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각개격파가 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서쪽에서 사르후로 향하던 두송은 나름 용맹함을 자랑하고 싶은 인물이었고, 가장 먼저 공을 세우려고 욕심을 부린다. 그는 계번성(界藩城)에서 누르하치가 15,000명과 함께 성을 축조하고 있으며 이들을 지키는 병력이 4~500명이라는 소식을 듣고 3만명 중에 2만 명을 사르후에 남겨놓고 계번성을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계획을 미리 알고 있던 누르하치는 넷째 아들인 홍타이지(후에 청나라 황제가 됨, 재위 1626~1643)에게 8기 중 2(15,000)를 내어주고 계번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남은 병력(4)으로 사르후를 공격하기로 한다. 누르하치는 4만의 병력으로 밤에 사르후에 있던 2만의 병력을 포위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계번성을 공격하려던 두송을 공격해서 두송을 전멸시킨다.

 

누르하치의 다음 목표는 북쪽에서 사르후로 향하던 마림의 부대였다. 마림은 누르하치의 기마병에 대한 방비를 미리 해 놓았다. 기마병으로 공격하기가 여의치 않은 누르하치는 마침 마림이 산을 등지고 진을 쳐놓았기 때문에 보병이 되어 산 위에 올라가서 공격하려고 한다. 이러한 누르하치의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던 마림이 대응하여 산 정상 근처에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마림은 이때 자신과 함께 있었던 반종안에게 응원군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마림과 사이가 안좋았던 반종안이 응원군을 보내지 않아서 마림의 부태가 패하게 된다.

 

두송과 마림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서여진의 예허부는 돌아간다. 양호도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여백에게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여백은 이성량의 아들이고 이여송의 동생으로 어린시절에 누르하치와 사이좋게 지냈던 인물이었다.

 

남은 부대는 강홍립과 합류해서 사르후로 향하려 한 유정(1558~1619)이었다. 유정은 임진왜란때 우리를 돕기 위해 왔던 장수로 순천왜성에서 수군이 싸울 때 소극적으로 싸워서 수군인 진린이 유정의 기를 찢을 정도로 유정에게 화를 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유정은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들 중에서 조선 백성을 약탈하지 않고 나름 열심히 싸운 장수이기도 하다. 유정은 이때 양호와 사이가 안좋아서 양호가 자신이 죽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군율이 엄해서 그냥 누르하치와 싸우다 죽어야 할 것 같다고 강홍립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의 왕 광해군은 당시에 중립외교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서인들이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나라가 망할지언정 명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하들을 향해서 광해군은 너희들이 조선의 신하냐 명의 신하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강경하다면 자기들이 직접 싸우러 갈 것이지... 입만 살아서...) 광해군은 당시에 출전하는 강홍립에게 패하지 않는 전투를 하라고 명하였다.

 

『광해군 일기』(정초본) 137권, 광해 11년 2월 3일 정사 2번째 기사
도원수 강홍립에게 하유하였다.
당초 도료군 1만명은 오로지 양성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단속하고 훈련시켰으므로 장수와 졸개들이 서로 익숙하니, 지금에 와서 경솔히 바꾸기는 곤란하다.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

 

그런데 차라리 명나라 입장에서는 강홍립의 부대가 합류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 이때 평양감사 박엽(1570~1623)이 강홍립의 부대에 군량미를 보내지 않아서 유정의 부대와 합류하기 전에 조선군은 상당히 굶주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홍립이 보기에는 굶은 조선 부대가 유정의 부대보다 싸움을 더 잘 할 것 같았다고 한다. 결국 강홍립은 명나라 군량미를 얻어먹게 된다. (박엽은 인조반정 이후에 목이 잘린다) 조선군은 이틀동안 여진 부락을 약탈해서 죽을 끓여 먹었고 이틀동안 유정과 강홍립의 부대는 지체하게 된다. 만약 이틀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마침 두송과 마림을 상대하느라 수도가 비어있을 때 유정의 부대가 수도를 점령했을지도 모른다.

 

사르후 전투(1619.3.2)에서 두송을 패배시키고, 상간하다 전투(1619.3.2)에서 마림을 패배시킨 누르하치의 부대가 유정의 부대와 싸우게 된다(아부달리 전투, 1619.3.4). 당시에 강홍립의 부대는 조총부대였기 때문에 명나라 부대가 엄호를 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정의 부대가 너무 빨리 누르하치의 기병에게 제압당했고, 유정은 전투 중 화약더미를 쌓고 부장들과 함께 그 위에 올라가 자폭하였다. 곧바로 누르하치의 부대가 조선군에게 달려들었는데, 조선군의 좌군을 지휘하던 김응하(1580~1619)는 끝까지 사우다 장렬하게 전사히였다. 여진족의 기병들도 김응하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김응하는 싸우기 전에 자신의 옷을 찢어서 혈서를 써서 말에 묶어서 말을 고향으로 보냈고, 그 말이 고향까지 와서 동생이었던 김응회가 김응하 장군 신도비를 세운다. 말은 여물을 먹지 않고 굶어죽었다고 한다강홍립은 중군을 수습해서 산 위로 올라가서 진을 쳤는데, 식량이 없어서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부사(심하) 전투(1619.3.4)이다.

 

사르후 전투는 총 4번의 전투가 진행되었다.

  • 사르후 전투(1619.3.2) 두송 패배
  • 상간하다 전투(1619.3.4) 마림 패배
  • 아부달리 전투(1619.3.4) 유정 패배
  • 부차(심하) 전투(1619.3.4) 김응하 분전, 강홍립 항복

 

사루후 전투 이후에 주력군을 상실한 명나라는 더 이상 요동을 공격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사르후 전투 이후에 살아 돌아온 조선의 병력은 2,700명이었다. 그리고 항복한 강홍립은 몰래 광해군에게 장계를 올려서 후금의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강홍립의 부대가 소멸되고, 이괄의 난(1624)으로 평안도의 최정예 병력이 손실을 입게 되어서 이후 정묘호란(1627)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그야말로 자동문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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