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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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18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의 주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는 아래와 같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한 명의 싸이코(똘아이)의 야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의 백성이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쟁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이 난다. (당시 조선의 인구 20~50%가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렵게 낳은 토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믿을만한 가신들을 조선 정벌에 참여하게 하였고, 조선을 점령했을 때 영지를 하사하고 나름 가신들의.. 2021. 5. 7.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조선, 명나라, 일본은 휴전기간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조선은 배제된 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명나라측에서는 심유경(1526~1597)이 나섰고, 일본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회담에 응했다. 이때 심유경은 명나라 사신 2명과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7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7가지 요구사항]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명나라와 일본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관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감합무역 :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대신이 통교를 서약.. 2021. 4. 28.
[임진왜란46] 이순신을 죽이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feat. 조선 최고의 재상 이원익) 이번 영상은 아마도 고구마를 몇 개 먹는 느낌일 것이다... 미리 각오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왕은 도망자였고, 백성까지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까지 생각한 자였다. 그런데 자신보다 백성을 더 끔찍이 여겼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보다 더 백성들에게 신망을 더 받고 있는 장수가 등장했다(이순신).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왕 선조가 이순신에게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고, 무모한 출전명령을 장문포에서 왜선 2척을 격침시킨다. 그런데 이때부터 원균과의 사이가 노골적으로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선조실록 1594년 8월 21일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이 .. 2021. 4. 27.
[임진왜란44] 이순신이 가장 두려웠던 순간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에 사실상 4년간의 휴전에 돌입하게 된다. 명나라의 입장에서 그동안 사대를 했던 조선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일단 자국의 영토에서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조선에 참전했던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일단 평양과 한양을 탈환했는데 그 와중에 일본군의 조총의 위력을 경험하고 되도록 더 이상 싸우는 것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말들이 역병에 걸리게 되어서 12,000필의 말이 죽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졸지에 요동 기병이 요동 보병으로 바뀐 것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도 역시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임난 초기에 한양까지는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지만 평양까지 점령한 이후에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양성을 후퇴한 이후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 2021. 4. 26.
[임진왜란43]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의 2차 당항성 전투(feat.원균의 헛된 꿈) 임진왜란 시기 구분 1기 - 임진왜란 : 1592.4~1593.6 [부산성전투에서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2기 - 휴전기 : 1593.6~1597.7 3기 - 정유재란 : 1597.7~1598.11 [칠천량해전에서 노량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은 휴전기인 1593년 7월에 본영을 한산도로 옮긴다. (진주성이 일본의 손에 넘어간 후에 육지로 여수 본영이 공격당할 것이 우려되었나?) 난중일기에 보면 5월부터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었다. 이순신은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7월 2일. 맑다. 늦게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보았다. 선전관은 오후에 돌아갔다. 날이 저물녘에 김득룡이 와서 진양(진주)이 함락되었다고 전하며 “황명보, 최경회, 서예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이 죽었다”.. 2021. 4. 26.
[임진왜란38] 웅포해전-임진왜란 최초 수군들의 상륙공격│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후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 가문을 지키려고 했던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 중심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중심의 동군의 맞붙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가 일어난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고 에도 막부가 시작된다(1600~1868).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서군의 장수 세 명의 목을 날린다. 이때 목이 날아간 장수는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로 모두 다 행주대첩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다. 이순신은 1592년에 총 4차례 출정을.. 2021. 4. 25.
[임진왜란22] 안골포해전 - 쥐구멍에 숨으셨어요? │황현필 한국사 이순신 장군의 3차 출정은 7월 6일 여수항을 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7월 8일에 한산도대첩에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혼내주었다. 오늘날에는 한산도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견내량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때 『견내량파왜병장』이라는 장계를 올렸다. 유성룡의 『징비록』 중에 일본의 장수 고니시는 도망치는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 수군 10만이 서해로부터 오게 되는데 대왕의 행차는 어디로 가십니까?” 이것은 이제 곧 일본의 수군이 서해로 올라와서 수륙병진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산도대첩으로 일본의 수군이 서해로 올라가지 못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고,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게 된다. 솔직히 이순신이 .. 2021. 4. 14.
[임진왜란20] 역사상 최악, 용인 전투 │황현필 한국사 1592년 4월 13일에 전쟁 발발한 이후에 부산성에서 정발, 다대포성 윤흥신, 동래성의 송상현, 낙동강 방어선에서 박진이 분전하였으나 북상하는 왜군을 막지 못했고, 상주 전투에서 이일이 패하고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면서 임진왜란 개전된 지 20일만에 한양이 5월 3일에 점령을 당했다. 김명원이 한강 방어에 실패했고, 이후 임진강 방어에 나선 김명원과 한응인이 패하고, 평양성을 지키던 윤두수와 이원익이 패배하면서 선조는 일찌감치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때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등장하여 1차 출정(옥포ㆍ합포ㆍ적진포 해전)과 2차 출정(사천ㆍ당포ㆍ당항포ㆍ율포 해전)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놓고 있었다. 이때 2차 출정의 당항포 해전(6월 5일)과 율포 해전(6월 6일)에서 수군이 승리하고 있을 무.. 2021. 4. 12.
[임진왜란17] 사천해전(과연 거북선은 제 역할을 할것인가?) │황현필 한국사 6월 3일에 이억기(전라우수영)가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월 28일경 원균이 왜선 10여척에게 쫓겨서 노량 근처로 피신해 있다는 전갈을 받고 출정하기로 하였다. 이때 당시 전라좌수영의 고문격인 70대 후반의 정걸(1514~1597) 장군에게 거북선 1척과 판옥선 몇 척을 주어 전라좌수영 근처 해역을 지키도록 하고, 23척의 판옥선(아마도 거북선 2척을 포함)을 거느리고 노량 근처의 원균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노량에서 원균의 판옥선 3척과 합류한다. 당시 2차 출전 명부는 다음과 같다. “중위장에 순천부사 권준, 전부장에 방탑첨사 이순신, 중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 후부장에 홍양현감 배홍립, 좌부장에 신호, 우부장에 김득광, 좌척후장에 녹도만호 정운,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 자별도장에 우후 이몽구.. 2021. 4. 11.
[임진왜란16] 히데요시의 분노와 이순신의 잠 못드는 밤 │황현필 한국사 최근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원균이 과연 유능한 장군이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원균은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인 것 같다) 임진왜란 전에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지역에서 군량미를 조달하고 각 진영을 조율하는 초유사로 임명된다. 이때 김성일은 이렇게 보고한다. “도내에 감사가 없으니 모든 적변을 당연히 신이 아뢰어야 합니다.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지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2021.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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