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조선, 명나라, 일본은 휴전기간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조선은 배제된 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명나라측에서는 심유경(1526~1597)이 나섰고, 일본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회담에 응했다. 이때 심유경은 명나라 사신 2명과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7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7가지 요구사항]
-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 명나라와 일본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관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감합무역 :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
-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대신이 통교를 서약하는 문서를 교환한다.
- 조선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 일본은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을 송환한다.
- 조선의 중신이 일본에 영원한 항복을 서약한다.
이 내용을 그대로 명나라 황제에게 전했다가는 심유경의 목이 그대로 날아갈 것을 예상한 심유경은 고니시의 부하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신인양 속이기로 하고 명나라에 건너간다. 그런데 명나라 총사령관이었던 송응창(1536~1606)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항복문서를 받아오라고 해서 심유경은 부산에 가서 고니시와 짜고 거짓 항복문서를 들고 북경까지 가서 명나라 황제 만력제(1572~1620)에게 바쳤다. 이때 명나라는 일본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 내용]
- 조선에서 완전 철병할 것
-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 관백 히데요시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역시 이것을 일본에 그대로 전하게 되면 고니시의 목도 날아갈 판이었다. (그런데 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니시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도 고니시를 함부로 죽이지는 못하였다) 명나라는 심유경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조선에 출정을 주장했던 병부상서 석성(?~1599)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심유경은 도망쳤다가 조선에서 명나라 장수에게 잡혀서 목이 날아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1596년 9월에 알게 되었고, 재차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정유재란은 1597년 7월에 일어난다. 그 사이 10개월동안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협상을 시도한다.
처음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해서 조선 왕을 볼모로 잡고 조선 병력을 합쳐서 명나라를 치고 인도까지 진출하려고 했으며, 조선은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이순신에 의해 수륙병진작전이 막하게 되었고 조선정벌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면 전쟁을 일으킨 자신의 입지가 불안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과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이 전부터 조선과 일본도 대화와 협상이 시도되고 있었다. (사명당 유정이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기도 했고, 고니시측과 조선 조정과 대화가 오고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장에서는 자기 입장만 쪽팔리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토요토미 : 조선의 왕자 한 명만 와서 항복하는 시늉만 해라
조선 : 못해!
토요토미 : 그러면 조선 조정을 대표하는 신하가 와서 항복하는 시늉만 해줘라
조선 : 못해!
조선으로서는 언감생심 항복은 생각도 안하고 있었으며, 일본이 한양을 점령했을 대 선정릉(선릉 : 성종의 무덤, 정릉 : 중종의 무덤)을 훼손했던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처음에 임진왜란이 시작될 당시에는 빨리 조선을 거쳐 명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조선 팔도를 일본 다이묘에게 나눠주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시마즈는 강원도, 평안도는 고니시, 호남은 고바야카와, 경기도는 우키타 히데이에...) 그래서 우키타의 경우에는 한양을 점령한 이후에 조선인을 함부로 살상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한양과 경기도가 자신의 땅이 될 것이기에 민심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학살은 제2차 진주성 전투 이전에는 생각보다는 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에는 오히려 일본의 지배가 낫다는 생각을 한 순왜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협상이 결렬되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은 백성들(민간인들)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죽인 것을 보고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 보내라고 명령한다. 일본 교토에 13만명의 귀무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있었으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감히 정유재란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마침 멍청한 선조와 바보같은 조정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백의종군을 시켰고, 원균(1540~1597)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원균의 삽질과 이순신의 공백이 정유재란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일본이 감행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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