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47] 백의종군, 이순신도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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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47] 백의종군, 이순신도 많이 울었다.

by [수호천사]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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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충청도 병마사, 전라도 병마사로 가 있던 원균은 자신이라면 부산을 공격할 것이라는 장계를 올린다.

 

<원균이 자신이라면 부산을 공격하겠다 라는 상소> 선조실록 1597122
다만 수륙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이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펼치고, 1백 여 명이나 2백명 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하건데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당시의 상황은 가끔 일본군의 정보를 알려주던 일본의 요시라가 가토 기요마사가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상륙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흘렸고, 이 정보를 믿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부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말도 안되는 명령이었지만 부산 앞바다까지 가서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이고 돌아오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의 정보를 원균이 알 정도면, 일본의 가토가 ‘날 죽여주세요~’ 하면서 순순히 대놓고 부산으로 이동할 것인가?]

 

<이순신을 파직시키라는 윤두수> 선조실록 1597127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행장이 지휘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윤두수는 원균의 5촌 친척이다)

 

<이순신을 잡아오거라> 선조실록 159726
이순신을 잡아올 때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 올 것도 말해 보내라.”

 

이순신은 1597226일 한산도에서 압송되었고, 159734일에 한양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15971월부터 3월까지의 일기는 빠져있다)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심문 명령서> 선조실록 1597313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무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죽여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으로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아마도 조선의 형벌 종류(태ㆍ장ㆍ도ㆍ유ㆍ사) 중에 장형(곤장)은 맞았을 것이다. 이때 이순신의 나이는 53세였고 지난번 사천해전에서 조총 탄환에 어깨를 맞았던 몸이었다.

 

[이순신을 살린 상소]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모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 줄 수가 없다 하고,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덜어 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순신은 41일 의금부에서 나온다.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이순신은 43일에 한양을 떠나 45일에 아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여수에 있던 이순신의 어머니는 이순신이 잡혀갔을 때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죽기 전에 이순신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서 나룻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거쳐 올라오고 있었다. 이순신의 어머니가 411일에 배 위에서 돌아가셨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411일에 악몽을 꾸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다.

 

 

4월 11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서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4월 13일.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4월 16일. 궂은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에 옮겨 대어,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일이 급해서 소리 내어 울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4월 18 비 오다. 하루 내내 비가 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나왔다.

 

4월 19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뇌의 집에 이르러 선조의 사당에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났다.

 

5월 4 비 오다.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 무렵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게 비가 몹시 퍼부었다.

 

5월 5 맑다. 늦게 충청 우수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백의종군 과정에서 자식을 보기 위해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이순신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막말로 선조가 자기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아직 전쟁중이었기에 이순신은 아산에서 길을 떠나 순천에 머물렀고 합천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간다. 이때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조선 수군을 깨끗하게 말아먹었으며(1597.7.15), 이 전투에서 평생 동지였던 이억기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5월 6 맑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냐? 통곡을 하더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 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또 남원의 추수 일을 감독하는 데 대해서도 걱정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남원의 추수일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남원의 운명에 대한 예지몽이 아니었을까? 이후 칠천량에서 원균이 대패하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15978월에 남원성 전투에서 남원성이 함락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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