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45] 조선군 단독 수륙양면작전 - 장문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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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45] 조선군 단독 수륙양면작전 - 장문포 전투

by [수호천사] 2021.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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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왜 부산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일단 전염병으로 병력의 손실이 컸다. 아마도 6~7천으로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남쪽에 일본군 4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성을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선제공격 대신에 한산도를 지키고 있으면 더이상 일본이 한산도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선조는 조급했다. 이런 조급증의 선조를 부추긴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윤두수였다. 도체찰사 윤두수(1533~1601)가 선조에게 왜성을 선제공격하자는 건의를 강하게 한다. 유성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윤두수 편을 들었고, 선조는 육군과 수군이 연합해서 왜성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원균이 윤두수와 짝짜꿍이 되어 주장했다고 한다)

 

겸 삼도 도체찰사 좌의정 윤두수가 치계하기를, 대개 용병한 지 3년에 재력이 고갈되어 보존하고 지키는 어려움이 하루하루 심해가니, 이런 형세를 가지고 오래 버티기는 결고 곤란합니다. 구구하게 험한 곳에다 관방을 설치하여 파수하면서 민력을 다 소비해도 끝내 효과가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중외의 세력을 합하여 힘을 모아 한번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기면 하늘이 도와준 것이고 이기지 못해도 종묘 사직에 오히려 할 말이 있을 것이니다. 『선조실록』

 

마지막 문장을 보면 이기지 못해도 종묘 사직에 할 말이 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비장함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한양을 빼앗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윤두수의 주장에 비변사도 무리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대저 오늘날의 형세는 지킬 수도 없고 사울 수도 없으므로 윤두수의 계책은 죽음 속에서 삶을 구하는 데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지금 이미 도원수(권율)와 의논하여 진취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하니, 그 형세가 어려운 일이라고 핑계하여 중지시킬 수도 없는 형세입니다. 『선조실록』

 

비변사는 선조의 의중이 이미 공격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차마 반대하지는 못하고 이런 애매한 의견을 낸 것 같다. 이 무렵 조선군 현황은 다음과 같다.

 

  • 체찰사 : 윤두수
  • 도원수 : 권율
  • 3도수군통제사 : 이순신
  • 순변사 : 이일
  • 경상병사 : 김응서 (후에 이순신을 가장 많이 공격하는 인물)
  • 충청병사 : 선거이
  • 경상우수사 : 원균
  • 충청수사 : 이순신
  • 충용장 : 김덕령
  • 조방장 : 곽재우
  • 수군조방장 : 김경노
  • 수군조방장 : 박종남
  • 별장 : 한명련
  • 조선 해군 전선 50여 척

 

 

[장문포해전. 1594.10.1~6]

 

1594년 10월 1일에 1차 공격이 있었다. 당시에 추수를 하기 위해 많은 수군이 각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육지의 의병들이 노를 저으며 장문포를 향해 갔다고 한다. (이때 유성룡이 전투를 하면 안된다고 간해서 다시 중지하라는 장계가 내려오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전투가 벌어진 후였다) 일본군은 예상대로 왜성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은 장문포와 영등포를 공격해서 왜선 2척을 격침시켰지만 적이 대응을 하지 않아서 10월 4일에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때 곽재우와 김덕령의 의병들이 상륙해서 공격했다가 오히려 일본군의 조총으로 피해를 입게 된다. 10월 6일에 다시 장문포를 재공격하였는데, 일본군이 명나라와의 화친 약속을 상기시키는 팻말을 세우도 도주하였고, 그 팻말을 보고 어쩔 수 없이 한산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전투는 실패한 작전이지만 패배한 전투는 아니었다.

 

이때 총사령관인 윤두수는 전장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 그는 순천에 있으면서 순천부사 권준(1541~1611)에게 탐관오리 죄명을 씌워서 잡아들였다. 그리고 당시 도원수 권율도 전장에 없었다. 그는 의병만 전투에 투입했고 그 자신은 구례에 있었다고 한다.

 

[장문포ㆍ영등포 작전에 대한 병조의 보고]
(1015) 병조좌랑 김상준이 구례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선조 : 그곳의 소식은 어떠한가
김상준 : 수군은 지금까지 군사를 퇴각시키지 않았습니다.
선조 : 원수(권율)와 말해보았는가? 그곳의 일을 자세하게 말하라
김상준 : 원수가 말하기로는, 수군은 아직도 흉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조 : 흉도에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리고 원수는 뭐라고 말하던가?
김상준 : 수군은 2만여 명이지만, 육군은 여러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는 것이 1천 명도 되지 못합니다. 원수는 스스로 말하기를 명령을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한 가지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다만 먼저 신의 죄부터 꾸짖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
(중략) 3일 진시에 수군을 동원하여 장문포에 벌려 세우자 적들은 강어귀에 진을 쳤습니다. 먼저 선봉으로 하여금 성에 접근하여 도전하게 했더니 적의 무리가 화살과 돌팔매에 멀리 피하여 혹은 성안으로 도망쳐서 매복하기도 하고 혹은 성 밖에 땅을 파고 몸을 숨기기도 했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탄환도 쏘고 큰 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는 주먹만하고 3백여 보까지 갔으며, 전날보다 갑절이나 맹렬하였으며, 기타 장비들도 아주 흉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진 근처에는 마초가 수없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신이 정예 군사들을 뽑아 보내어 경계를 서는 왜놈들을 쏘아서 쫓아버리고 전부 불태우게 하니 화광이 밤새도록 하늘에 잇닿았습니다. 대체로 육군이 아니면 육지에 있는 적을 수군만으로는 싸움으로 끌어낼 형세가 더 이상 없었으므로 지극히 한스러웠습니다.
신이 다시 통제사 이순신, 육병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수륙군이 합세하여 공격하는 문제에 대한 계책을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길을 자세히 아는 거제의 활 쏘는 군사 15명을 뽑아내어 길잡이를 시키고 신이 관할하는 여러 배들에서 육지 싸움에 적합한 자원병 31명을 함께 뽑아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거듭 강조하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일 묘시에 여러 배들이 적진에 돌입하여 혹은 명화비전도 쏘고 혹은 현자총통과 승자총통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 선들을 영등포의 적의 소굴로 갈라 보내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동쪽을 치는 척하다가 서쪽을 치는 모양을 보이며 놈들끼리 서로 응원할 수 있는 길을 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보루를 굳건히 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섬멸할 길이 없어서 분개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원균의 장계를 보면, 자기 혼자 다 싸운 걸로 보고하고 있다. 이렇게 용맹무쌍한 장수가 임진왜란 발발 때 판옥선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도망친 장수였던가?

 

상이 이르기를, “한 명의 왜적도 포살하지 못하였다고 하던가?” 하니, 성룡의 아뢰기를, “적이 나와 싸우지 않으니 어떻게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6명의 왜적을 사살하였다고 합니다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수전이었기에 대패까지는 안 하였지만, 육전이었다면 반드시 대패 하였을 것입니다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유성룡은 선조의 바보같은 명령이 하마터면 대패했을 것이라고 직언했던 것이다.

 

[권준이 작전 중에 잡혀가게 된 이유]
사간원에서 건의하였다. 순천 부사 권준은 가렴주구만을 일삼아 백성들이 고혈을 짜내고, 공장들을 모아 진귀한 물건들을 만들도록 하는가 하면, 토지 면적에 따라 배정하고는 고기와 생선을 바치도록 독촉하는 등 자신을 쌀찌우고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기 위한 밑천을 장만하는 일이라면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또 창고의 쌀을 훔쳐내어 배 3척에 가득 실었다가 감사에게 적발되었으며, 짐바리로 무명을 실어다가 서울의 곽지추의 집을 샀습니다. 수군에 있을 때에는 술과 고기를 잔뜩 차려놓아 낭비가 끝이 없었고, 심지어는 창녀까지 데리고 거리낌없이 음탕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활 쏘는 군사들을 뽑아내어 거제에서 몰래 붉은 빛깔이 노루를 사냥하게 하였다가 몽땅 왜적에게 빼앗겼습니다. 그의 죄상을 따진다면 극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잡아다 신문하여 법에 따라 죄를 주기 바랍니다.” 대답하기를 건의한 대로 하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1594년에 접어들면서 이순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의 사람들을 모함해서 제거하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균과 이순신이 사이가 벌어지게 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조정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김수가 아뢰기를, “원균과 이순신이 서로 다투는 일은 매우 염려가 됩니다. 원균에게 잘못한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이 점차 악화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하였다.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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