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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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13

[임진왜란62] 노량해전(2) - 이 원수를 갚을수만 있다면...(짜릿함, 먹먹함, 반전) [임진왜란62] 노량해전(2) - 이 원수를 갚을수만 있다면...(짜릿함, 먹먹함, 반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이 1선발로 참전했고, 임진왜란 초기의 주요한 전투를 다 승리로 이끈 상징적인 장수였다. 조선의 조정 입장에서 복수를 위해 일본 열도를 공격하지는 못하더라도 돌아가는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특히 고니시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 공교롭게 고니시는 일본으로 가기 가장 어려운 지역에 있었다. 순천왜성이 있는 고니시는 병력 손실을 당하지 않고 일본으로 가고 싶은 생각에서 명나라의 유정과 진린 등에게 뇌물을 바친 것이다. 명나라 장수들에게는 조금 통했지만 이순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사천의 남.. 2021. 5. 7.
[임진왜란61] 노량해전(1) - 이순신, 역사상 최대 해전을 기획하다. [임진왜란61] 노량해전(1) - 이순신, 역사상 최대 해전을 기획하다. 기원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최대 해전은 노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니시의 고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조선에 출정했던 왜군들은 본국으로 가려고 한다. 이때 순천왜성을 지키고 있던 고니시는 육지로 가자니 너무 멀고 도중에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서 위험하고 바다로 가자니 이순신과 진린이 막고 있어서 쉽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고니시의 흥정 1] 고니시는 우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명나라 유정과 흥정을 하였다. 고니시는 자신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가게 눈을 감아준다면 순천왜성의 군량미와 무기를 유정에게 넘기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유정은 명나라 군졸 40명을 인질로 내어준다. [고니시의 항의 1] 15.. 2021. 5. 7.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의 주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는 아래와 같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한 명의 싸이코(똘아이)의 야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의 백성이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쟁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이 난다. (당시 조선의 인구 20~50%가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렵게 낳은 토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믿을만한 가신들을 조선 정벌에 참여하게 하였고, 조선을 점령했을 때 영지를 하사하고 나름 가신들의.. 2021. 5. 7.
[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최근 원균의 후손들과 원균의 고향 평택시에서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작업이 있다. 원균이 재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인가? 원균은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 판옥선 74척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1만여명의 병력을 해산하고 튄 인물로, 일본군이 경상도에 쉽게 상륙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인물이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 무능력함도 보여주었고,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을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원균을 재평가해서 띄우려는 어처구니 없는 평택시에 대한 기사 한국사를 가르치는 선배 중에 1881년에 청나라 무기를 배우기 위해 청나라로 건너갔던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의 고손자인 분이 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 2021. 4. 28.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조선, 명나라, 일본은 휴전기간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조선은 배제된 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명나라측에서는 심유경(1526~1597)이 나섰고, 일본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회담에 응했다. 이때 심유경은 명나라 사신 2명과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7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7가지 요구사항]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명나라와 일본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관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감합무역 :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대신이 통교를 서약.. 2021. 4. 28.
[임진왜란39] 한양 탈환, 쟤들 살려 보내야해?(feat.정걸의 용산 식량기지 박살과 고언백의 노원평 전투)│황현필 한국사 평양성을 빼앗기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후퇴하였고, 나머지 일본군도 한양으로 모여들어서 한양에는 5만이 넘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한양에 있을 수 없었다. 왜 그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을까? 1. 군수 물자 및 보급품 부족 : 이미 이순신에 의해서 남해의 제해권이 장악되고 한양에 남아 있는 일본군은 군수품이나 보급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 일본군의 막대한 병력 손실 : 여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일본군은 22만에서 1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10만 명이 사망한 것이다). 3. 장기전에 지치고 병든 일본군 4. 명군의 참전 : 명나라 해안을 노략질하면서 경험한 무능한 명나라 군사들이 아니라 요동과 절강성의 정예부대를 경험한 후에 일본군은.. 2021. 4. 25.
[임진왜란35] 걔네들 기준 임난 3대 승리 중 으뜸 - 벽제관 전투│황현필 한국사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1592년 4월) 두 달만에 평양성을 빼앗겼다가(1592년 6월) 6개월만에 평양성 탈환하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에서 1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이 1만여 명의 수급에는 상당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양성에는 순왜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되어 이여송이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부대가 절실했던 조선의 조정에서 이여송을 변호해 주는 일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한 고니시의 전투목록은 아래와 같이 임진왜란 초기의 대부분의 전투를 고니시의 부대가 치렀으며, 그 와중에 조금씩 병력의 손실이 생겼을 것이다. 18,700명의 병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으로 살아돌아갈 때 불과 5.. 2021. 4. 24.
[임진왜란 34] 평양성 탈환전(이여송+류성룡+서산대사vs고니시) │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 중 평양에서의 4차례 전투가 있었다. 제1차 평양 전투 - 1592년 6월 15일(왕성탄 전투, 평양성 점령당함) 제2차 평양 전투 - 1592년 7월 17일(조승훈 패배) 제3차 평양 전투 - 1592년 8월 1일(조선군 패배) 제4차 평양 전투 - 1593년 1월 8일(이여송 승리, 평양성 탈환) 제1차 평양 전투(1592.6.15) 선조는 대동강까지 진격한 일본군을 보고 의주까지 도망가면서 윤두수(1533~1601), 김명원(1534~1602), 이원익(1547~1634)에게 방어하라고 시켰다. 평양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쪽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벽도 잘 수축되어 있었다. 수비를 하던 조선군이 의외로 선제공격을 하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병사들이.. 2021. 4. 24.
[임진왜란33] 역전되는 전세, 요동 기병의 고니시 공격 │황현필 한국사 [8분 정도까지 복습모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하고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한다(5월 3일에 한양을 빼앗김). 원래 일본군은 한양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가 도망가면서 전쟁이 꼬이게 되었다. 한양까지만 대비하고 건너온 일본군은 한양 이북의 지도나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진격하는 데에는 40일이 걸렸다(6월 15일). 명나라 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약간의 식민사관에 묻혀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한 전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고니시가 평양 이북으로 진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부대 감소와 사기 저하 보급로 끊김 의병에 대한 두려움 명군 참전에 대한 두려움 추위에 대한 공포 한편 요.. 2021. 4. 24.
[임진왜란10] 임진강&대동강 방어전(광해군 분조를 이끌다)-절대순삭ver. │황현필 한국사 일본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서둘러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왕을 잡게 되면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일본의 100여년의 전국시대 전쟁의 패턴은 성주가 항복하거나, 할복하면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다. (최후까지 항전하면 그 지역은 철저하게 도륙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백성들은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처음에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성주가 도망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인 선조는 일본군의 허를 찔러 가장 용감하게 도망쳤다. (이것이 임진왜란에서 선조가 한 가장 뛰어난 활약이었다... 손자병법의 36계 줄행랑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가장 충격과 멘붕을 선사했다...) 선조가 도망친 이후에 일본군은 멘붕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양을 점령한 이후에 곧바로 북진하지 못한 것은 이순..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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