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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13

[임진왜란9] 선조의 파천과 한강 방어전 (패장은 승진, 승장은 참수?) 도대체 궁궐은 누가 불태운거야? │황현필 한국사 지도에 등장하는 별표는 선조가 도망가면서 세운 임시 수도라고 할 수 있다. 부산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밀양을 지나 탄금대에서 신립을 격파한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와 (추풍령에서) 합류한 제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사실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1선발 고니시가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부하를 가토에게 제공해준다. 그런데 가토가 허를 찔러서 새벽에 먼저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뒤통수를 맞은 고니시는 기병만 데리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한양에서는 이미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한 직후에 선조는 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두수 같은 관료들에게 이미 튈 준비를 하라고 해 놓고 모른척 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회의를 하게 된다. 이때 파천을 주장하는 이산해(1539~1609)와 목숨걸고 싸우기를 주장.. 2021. 3. 27.
[임진왜란8] 탄금대 전투 - 신립은 대체 왜? 이와중에 혼자 살아남은 1인? (아~조령과 문경새재) │황현필 한국사 조선에 출정한 일본의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서 밀양을 거쳐 대구를 격파하고 상주로 진격하여 조령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제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경주를 거쳐 죽령으로전진하고 있었으며, 제3선 발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는 김해를 공격하면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역제도는 오랜 기간 평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국방력은 약하지 않았다. 세조가 만든 보법제는 3인 1조로 구성되었으며, 한 명이 정군으로 선정되면 나머지 두 명의 경비를 충당하는 체제였다. 조선이 기본적으로 양인개병제였으나 양반과 상인, 중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병사로 차출되지 않았으며, 농민들만 병사로 차출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병농일치). 당시 군역 말.. 2021. 3. 21.
[임진왜란5] 부산성 전투 - 흑의장군 정발(오사카성VS창덕궁, 일본군단 해부) │황현필 한국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 정벌을 꿈꾸었을 때, 당시 본진은 교토였으며,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쿄’(당시에는 오지)로 쫓아낸 상태였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 ‘7년 전쟁’(1592~1598), ‘조일전쟁’이라고도 하는데, 명나라는 명나라는 ‘항왜원조전쟁’이라고 한다. 당시 다이묘의 생각은? 조선 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도 내색을 하지 못했다. (토요토미에게 걸리면 조선으로 건너가기 전에 목이 날아갈 판이었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열도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가장 가까운 지역에 나고야 성을 축조(오늘날에는 없음)하였다. (일본의 오사카와 도쿄 사이에 있는 나고야에 있는 성과 다름) 참고로 나고야는 오사카와 도쿄 사이에 있는 도시이다. 오사카(한신.. 2021.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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