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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1863~1949)
수능 한국사와 관련되어 헐버트는 많은 부분 언급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학은 원산학사(1883)인데, 최초의 근대적 관학은 육영공원(1886)이다. 이 육영공원에서는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의 상류층 자제들에게 영어를 강의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외국인 선교사가 헐버트였다. 그리고 헐버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세계 지리 역사교과서인 『사민필지』(1891)를 만든 인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운동 일환으로 고종은 미국에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했다(1905년). 이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있는 ‘거중조정’(제3자적 입장에서 분쟁당사국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는 것)을 믿고 취한 조치였다. 그런데 이미 3개월 전에 미국의 윌리엄 태프트(1857~1930)와 일본의 가쓰라 다로(1848~1913)이 만나서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29)를 체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대통령은 헐버트를 만나주지 않았다. 가스라-태프트 밀약은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을을 때, 이상철,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이때 이들의 파견에 대한 일처리를 헐버트가 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헐버트를 ‘헤이그 제4의 특사’라고도 한다)
헐버트는 그 전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아리랑’을 악보에 실어준 인물이다. 그리고 주시경(1876~1914), 지석영(1855~1935)과 함께 국문연구소(1907)에서 한글에 대해 연구하면서 띄어쓰기와 마침표와 쉼표를 창안해 낸 인물이 헐버트였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대한제국의 외교특별위원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헤이그 특사와 관련해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했고, 헐버트는 거의 추방당하다시피 미국으로 건너간다.
당시에 고종은 내탕금(내수사에서 관리한 왕실의 사유재산)을 상해에 있는 독일은행에 예치시켜서 해외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활용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을 헐버트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헐버트가 그 돈을 찾기도 전에 일본이 서류를 위조해서 그 돈을 먼저 찾아가버렸다.
헐버트는 중장년을 미국에서 보내고 1945년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하면서 한국행을 선택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조선은 그가 태어난 곳 이상으로 고향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노년의 헐버트는 20여일이 넘는 항해로 몹시 지친 몸으로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도착하게 된다. 기나긴 여행으로 몸이 쇠약해진 헐버트는 한국에 돌아온지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었고 사회장으로 치러진 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히게 된다.
원래 헐버트 박사의 묘비를 이승만 박사가 써주기로 했는데 어찌된 연유인지 써주지 않아서 한동안 헐버트 박사의 묘비는 비어있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때 헐버트 박사의 묘비에 이름을 새겨주었다. 그 비석에는 Friend of Korea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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