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4] 이것이 정묘호란이다.(옷에서 잡음이ㅠ)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자(1616년) 명나라는 후금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해서여진의 예허부와 조선과 함께 후금을 공격하였다(1619년, 사르후 전투).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하면서 만주(요동과 요서)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의 군주는 광해군(1608~1623)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려고 했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임진왜란(1592년) 당시에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니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당시 상황으로 파병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비변사 뿐만 아니라 삼사의 젊은 관료들까지 나서서 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광해군과 찰떡궁합이었던 ‘대북’의 권력자 이이첨(1560~1623)도 파병을 요청하였다. 어쩔수 없이 광해군은 강홍립(1560~1627) 장군을 불러서 13,000명의 병력을 보내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명한다. 강홍립은 당시 명나라의 유정(1558~1619)의 부대와 합류해서 싸우다가 항복하게 된다. 강홍립은 조선 군주 광해군의 입장을 전한다. 실제로 누르하치 살아 생전에는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새롭게 조선이 왕이 된 인조(1623~1649)를 명나라는 허락하지 않는다. 2년간 왕으로 책봉받지 못한 인조는 당시 가도에 머물러 있던 모문룡의 갑질에 납작 엎드린 상황이었고, 철산 지역에서 둔전을 경작하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누르하치는 1626년 영원성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죽었는데, 뒤를 이어 왕이 된 홍타이지(1626~1643)는 조선을 정벌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인조 반정의 명분은 첫째, 명과의 의리를 저버렸다. 그리고 둘째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폈다. (그러면 군사라도 키울 것이지... 입만 살아가지고...)
당시 막 왕위에 오른 홍타이지의 왕권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근으로 상황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내심 조선을 침공하여 약탈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3만의 병력을 아민에게 주어 조선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린다.
1627년 1월 8일 심양에서 출발해서 압록강에 도착하는데 5일이 걸렸고, 이때 강홍립도 함께 내려오는 데 압록강 단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조선 정벌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후금이 조선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이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진압되는 과정에서 평안도의 방어선이 많이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인조정권의 4대 장수는 이괄(1587~1624), 정충신(1576~1636), 남이흥(1576~1627), 임경업(1594~1646)이었다. 이때 이괄의 난을 진압한 것은 정충신과 남이흥이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을 때 이괄의 부하 한명련(?~1624)의 아들 한윤(?~?)이 후금까지 도망가서 당시 조선의 지리와 군세를 알고 있다며 길안내를 자청했다고 한다.
후금의 군대는 1월 14일 의주를 공격하였다. 의주는 이순신의 조카 이완(1579~1627)이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에 한윤이 몰래 의주성에 들어가서 ‘광해군을 복위시키기 위해 군대가 들어올테니 성안의 주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하였고, 후금의 군대가 몰래 들어와서 성안의 조선군 3천명과 주민들을 포함한 만여명을 학살하였다. 이때 이완은 활을 맞고 죽었다는 기록과 화약고에서 자결했다는 기록이 있다
1월 15일에 곽산, 선천, 정주의 군사들이 정주의 능한산성에 집결해서 후금의 군대와 맞서 싸웠지만 후금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한다.
후금의 군대는 1월 21일 안주성을 함락시켰다. 안주성은 김준(1582~1629)과 남이흥 장군, 그리고 전상의 장군이 후금을 막아내려고 노력하였다. 3번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결국 점령당했는데, 남이흥과 김준은 화약고에서 함께 자결하였고, 전상의 장군은 백상루에서 최후까지 활을 쏘면서 대응하다가 남쪽의 임금을 향해 절을 하고 스스로 자결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본 후금의 장수들이 전상의 장군에게 감동하여 따로 시신을 수습해서 무덤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에 전상의 장군을 모시는 비와 사당이 만들어졌는데, 전두환이 전상의 장군과 같은 성씨라고 해서 만든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전상의 장군은 천안 전씨이고, 전두환은 완산 전씨라 엄한 짓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광주 주민들이 전경환(전두환의 동생)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 전상의 장군 공덕비를 파괴하는 일도 있었다.
항복을 권유하는 후금군에게 답변하는 남이흥의 글
“내가 나라의 명을 받고 변경을 지키는 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오랑캐를 무찌르게 하려 함이요, 오직 장군의 영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영위만을 가진 것으로 그친다면 그 어찌 나라의 뜻을 받드는 올바른 신하라 할 수 있겠느냐? 나에게는 다만 너희들의 오랑캐를 섬멸하는 일만이 있을뿐이요, 그것만이 영광되고 흔쾌한 일이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싸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영광된 죽음이 아니겠는가?”
후금은 이후 1월 23일 평양을 점령하고 곧바로 한양을 향한다. 이제 인조는 어디로 튈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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