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5] 정묘호란-웃픈역사가 재밌다?
후금의 아민(1585~1640)이 3만 병력을 거느리고 심양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 정주, 안주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향한다. 당시 평안도 병마사 남이흥 장군은 안주성에서 죽었고, 평양을 지키던 평안도 관찰사 윤훤(1573~1627)은 도망쳤다.
인조는 장만(1566~1627) 장군을 도원수로 삼고 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아서 황해도를 지키게 한다. 이때 황해도의 평산이 1차 방어선이고 2차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다.
장만은 출병할 때 당시 훈련도감에서 뛰어난 조총수 100명을 내어달라고 있지만 인조가 거절한다. (자신이 강화도로 가기 때문에 자기를 지켜야 한다고)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면서 소현세자에게 남쪽으로 가서 의병을 모으라고 시킨다. 임진왜란 때의 광해군처럼 소현세자는 전주지역에서 나름 민심을 수습하면서 활동한다.
일본의 침략 때 선조라는 역대급 군주가 찌질함을 보였다면, 여진족의 침략에서는 인조라는 군주가 등장해서 찌질함으로 선조와 비견되는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정치인들은 개그맨의 밥줄을 위협하는 DNA를 타고난 것 같다.
인조가 한양을 비우자 한양에서는 선혜청(대동미ㆍ대동포ㆍ대동전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청)이나 호조(호구ㆍ공부ㆍ전토 및 식량과 기타 재화ㆍ경제에 관한 정무를 맡아보던 중앙관청)이 불에 타버렸다.
후금의 군대는 심양에서 출발하면서부터 조선과 화친을 맺자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조선이 의주부터 털리면서도 나름 자존심을 지키면서 후금의 제안을 거절한다.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자신들이 칼 들고 싸우지도 못하면서 후금과 화의를 맺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평산을 점령한 후금은 화의를 제안한다. 이때 후금은 형제관계를 맺고 명과의 관계를 끊기만 하면 된다고 제안한다. 조선은 형제관계는 받아들이되 명나라와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고 버틴다. 결국 후금도 명나라와의 관계는 인정하는 선에서 화친을 맺게 된다.
사실 당시 후금의 장수 아민(1585~1640)은 슈르하치의 아들이었고, 자신이 지금 후금에서 나름 권력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누르하치에게 죽음을 당했고, 자신도 언젠가는 권력에서 몰려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에 눌러 살려고 작정했다. (당시 홍타이지는 안주까지 점령하라고 하고, 조선이 겁만 먹게 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만 끊게 하라고 했는데 아민은 한양까지 점령한 것이다) 아민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당시 주변의 장수들이 아민을 설득했다. (3만의 병력이 조선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득함)
『인조의 화친 교서』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작은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나가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향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양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정묘화약
- 조선과 후금은 형제가 될 것을 맹세한다
- 후금은 화약이 성립되면 군사를 철수시킨다.
- 양국은 서로 영토를 지켜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 조선은 명과 단교하지 않는다.
- 조선 왕족을 후금에 인질로 보낸다.
- 매년 사신을 교환하고, 개시하여 무역을 한다.
화친을 맺고 돌아가는 후금의 부대는 곱게 올라가지 않았다. 도중에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돌아가는 과정에 철산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으로 평안도 지역에서 양아치같은 행동을 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조실록 5년 3월 10일』
“산골과 해안에서 아들 딸과 재물을 마음대로 쓸어갔습니다. 지금의 화친은 백성을 살리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백성들이 어육으로 돌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모문룡을 인정하는 명나라의 생각
조선은 약하지만 울타리다. 우리를 도와 오랑캐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우리를 배반하여 오랑캐에 보탬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따라서 조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근래 요동의 육로가 끊어졌지만 조선이 조공하는 것은 철산에 명군이 있어 반역하려는 마음을 견제하기 때문이다.
수험 한국사에서 ‘정묘호란’ 하면 무조건 등장하는 인물 중에 ‘정봉수’(1572~1645)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위하면서 의주까지 갔던 인물인데 후금의 만행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용골산성을 지켰다. 후금의 부대가 공격해도 용골산성은 버텨냈다. 이 소식을 들은 평안도의 주민이 용골산성으로 몰려들었고, 정봉수는 좁은 용골산성에서 버티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섬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의주에서는 이립(?~1627)이라는 장수가 의병을 일으켜서 후금에 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섬으로 도망가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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