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6] 청 태종, 조선을 침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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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병자호란6] 청 태종, 조선을 침략하다.

by [수호천사]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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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6] 청 태종, 조선을 침략하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1619년 명나라와 조선이 사르후 전투에서 x박살났다. 사르후 전투에 군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나름 중립외교를 폈던 광해군(1608~1623)1623년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고, 이듬해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 평안도의 방어선이 약화된다.

 

후금은 지속적으로 산해관을 뚫으려고 하다가 1626년에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의 원숭환(1584~1630)에게 누르하치가 패하고 죽게되자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이듬해인 1627년에 후금이 조선을 공격한다(정묘호란). 이때 한양까지 점령당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튀었으며, 결과적으로 정묘화약을 통해 후금은 물러간다.

 

 

후금은 조선에게 판옥선을 요구했다. 육지로는 영원성과 산해관을 뚫지 못하니 바다를 통해 들어가려고 하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당연히 조선이 거절해서 사이가 나빠졌다.

 

 

그리고 조선은 후금의 눈엣가시인 존재였던 (가도에 있는) 모문룡(1576~1629)을 우대하였다. 당시 모문룡의 양아치짓은 가관이었다. 후금의 침략으로 변발을 한 조선 사람들의 목을 베어서 (후금 사람의 목이라고 속이고) 명나라에 보내면 명나라가 상으로 은을 내렸다. 모문룡은 상으로 받은 은으로 조선에서 식량을 사가지고 후금에 팔아먹는 이중 양아치짓도 했다. 인조는 명나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모문룡을 대접하였고, 이것 때문에 후금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홍타이지는 어머니가 몽골 사람이었기 때문에 몽골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몽골지역을 돌아서 베이징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 산해관을 지키던 원숭환이 요동의 기병을 거느리고 베이징으로 도우러 가자 홍타이지는 고립될 우려가 있어서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빠져나간다. 이때 후금은 명나라 환관들을 사로잡았었는데, ‘원숭환이 퇴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살았다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환관들을 풀어준다. 환관들은 베이징으로 가서 이 사실을 당시 명나라 황제인 숭정제(1627~1644)에게 알린다. 이때 베이징에서는 원숭환을 견제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이 즈음에 원숭환은 가도에 있는 모문룡을 잡아다가 죽여버린다. 그리고 모문룡의 부하들은 수군을 거느리고 후금에 항복하게 되었으며, 이때 명나라만 보유하고 있었던 홍이포까지 후금으로 넘어가게 된다.

 

 

황제는 원숭환을 죽이기로 한다. 황제를 만나러 간 원숭환은 혼자 성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듣고 들어갔다가 책형(磔刑)으로 죽게 된다. 후금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인조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홍타이지에게 개기기 시작한다.

 

홍타이지의 조선 책망
귀국이 우리나라에 주는 물건은, 귀국이 까닭 없이 명을 도와 우리를 침범했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려준 것이니

 

인조의 반항
남에게 의리상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고 힘이 닿지 않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에겐 다른 마음이 없다 하니 누가 믿겠소?”

 

정충신의 충언
옛 사람이 이르길 이른바 갑주를 입은 용사라는 자는 싸우자고 말할 뿐, 강화에 대해 혀를 놀릴 수는 없다고 하였나이다. 나라를 꾀하는 방법으로 볼 때 이처럼 위험한 계책을 써서야 되겠사옵니까?”

 

인조의 결국 교서는 수정했지만 뒤끝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쫌생이였으므로, 직언한 정충신을 날리고 김자점을 도원수에 앉힌다.

 

인조의 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 상사!
저놈들이 강하다 해도 때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고 우리가 싸움마다 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랑캐가 침략하면 과인이 앞길에 진주해 장수를 격려하고 서북의 군민을 위로하겠노라.”

 

인조가 청나라에 보내는 거의 선전포고문
우리는 의지할만한 군사와 재물이 없으나 강조하는 것은 대의이고 믿는 것은 하늘이오.
지난번 귀국이 침략해왔을 때 맹약을 맺고 물러갔으니 그것은 천도에 순종한 것이었소.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곤욕스럽게 하고 우리에게 따르지 못할 일로써 억지를 부리며 병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형제국을 압박해 우리가 먼저 전쟁의 꼬투리를 열었다고 말하고 있소.
귀국이 넓고도 깊이 생각하면 다행이겠소.”

 

훗날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앞장서서 싸웠는가? 당시 군비 확충은 하나도 하지 않고 전쟁이 나면 누군가 대신 싸워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성리학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왕인 인조는 병자호란 일어나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1580~1619)을 왕으로 추숭하는 작업을 한다.

 

후금은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한다. 이때 용골대(1596~1648)가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조선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결국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심한다.

 

홍타이지가 누르하치묘에서 조선 정벌을 고함
높고도 높으신 아버지 태조이시여, 하늘의 조서를 받아서 왕조를 창성하게 하고 나라의 기초를 창립하고 세우게 하고 특별한 공로와 자애롭고 효성 있고 준엄하고 성스러운 황제 신위의 앞에 옥좌를 물려받은 아들이 무릎을 꿇고 아뢰욉니다 담홍색 토끼해’(1627)에 아버지께서 남긴 신위의 힘에 힘입어 군대를 보내 고려국을 항복하게 하고 하늘과 땅에 맹세해 그들을 동생으로 삼고 해마다 암반들을 파견해 그 땅으로부터 나올 물건을 보내며 친선을 맺었습니다. 지금 고려국은 천지에 굳데 맹세한 것을 파괴하며 변심하였으니,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시비를 판별하여 정벌하고자 합니다. 아버지 태조이시여, 저희를 보우하소서!”

 

홍타이지의 조서
고려를 정벌하는 것은 우리가 전쟁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려가 맹세를 어기고 우리의 도망자들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투항한 공유덕과 경중명을 가로막고 공격했으며 모문룡을 지원했다. 또한 우리의 사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고 가져간 글을 보지 않았으며, 고려 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보낸 글은 명백히 형제지맹을 파기하는 것이었다.이에 우리는 고려를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이번 전쟁은 의로운 전쟁으로 절대 인명을 가볍게 해치지 말고 사찰과 능묘를 훼손하지 마라. 그러나 저항하는 백성은 모두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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