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7] 청 기병의 진격의 속도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당당했던 인조에게 최명길이 한마디 한다.
“곧 겨울이 되면 강이 얼텐데, 그러면 저들의 기병이 쉽게 우리 땅에 들어오려고 할텐데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보낸 문서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치 어떻게 너희를 구해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구원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전쟁의 책임은 근자감으로 깐죽거린 인조에게 있다는 말이며, 일국의 왕으로 백성을 돌보지 않고 명나라만 바라보는 바보같은 인조를 꾸짖는 글이다.
1636년 12월 2일에 청나라 대군이 심양을 출발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홍타이지는 우선 300의 기병을 보내서 최대한 빨리 한양까지 진격해서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이 300의 기병은 8일 만에 한양에 도달하게 된다. 뒤이어 천여 명의 기병을 보내서 먼저 보낸 300의 기병을 돕게 한 뒤에 자신이 친히 4만 5천의 병력(다른 기록에는 12만이라는 주장도 있음)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출정하였다. 당시 홍타이지가 보기에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처럼 공격하기 쉬운 나라였다.
당시 의주의 백마산성에는 임경업 장군(1594~1646)이 4천여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청의 군대가 지나쳐서 남하하였다. 그 당시에 조선은 청야작전을 펼치고 있어서 어쩌면 홍타이지로서는 일종의 모험이었을 수 있다. 장기전으로 돌입하거나 후방이 끊길 위험이 있었고, 임진왜란처럼 의병이 일어나면 오히려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3일에 청이 침입했다는 급보가 한양에 도착했는데, 바로 다음날에 적이 개성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는 먼저 봉림대군 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도 다음날 강화도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청나라의 선발대가 한양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조는 재위 기간 중에 한양을 세 번 버렸다. 이괄의 난(1624) 때 공산성으로 피신했었고, 정묘호란(1627) 때 강화도로 피신했었으며, 이번에 병자호란(1636년)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것이다.
청나라의 부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게 된다. 이 남한산성에서 처절한 47일간의 항쟁이 전개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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