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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6] 명량해전의 7대 의문점 해결 [임진왜란56] 명량해전의 7대 의문점 해결 1. 명량해전의 정확한 위치는? 전라우수영 앞바다는 잔잔한 바다였기 때문에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으로 올라타기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거리상으로 김억추의 배가 700미터 후퇴하여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수영 앞바다였다면 적이 양도를 돌아서 조선 수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적선은 정말 130척 이상이었다? 『난중일기』 이른 아침에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달려옵니다”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소대년고』 - 중국측 기록 순신은 우수영 명량 바다로 군사를 돌렸는데 날이 밝자 적선 五六.. 2021. 5. 3.
[임진왜란55] 명 량 대 첩 (feat.초대와 만찬, 33분순삭ver.) [임진왜란55] 명 량 대 첩 (feat.초대와 만찬, 33분순삭ver.) 임진왜란의 주인공은 이순신일 수밖에 없다. 적대감을 갖고 임진왜란을 들여다 본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이순신에게 감탄한다. 이것은 중국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조선은 “육군은 우리가 더 강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일본은 “육군ㆍ수군 모두 우리가 더 강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지에서 조선의 육군은 신나게 털렸고, 조선의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판옥선을 수장시키고 튈 때까지만 해도 일본쪽에서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런데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패하면서 약간 놀라기 시작했다. 처음에 일본측에서는 자신들의 실수 혹은 방심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후 이순신에게.. 2021. 5. 3.
[임진왜란54]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feat.어란포해전, 벽파진해전) [임진왜란54]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feat.어란포해전, 벽파진해전) 1597년 8월 3일 진주 손경례 가옥에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된다. 기록에 의하면 진주를 떠날 때 군관이 9명이고 병졸이 6명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전라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패잔병을 수습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 배설이 숨겨놓았던 12척의 판옥선을 찾고, 일본 수군이 서해바다로 올라가려고 할 때 싸워야 할 곳이 어딘지를 고민하는 조선수군 재건의 행보를 시작한다. 8월 4일에 이순신은 구례 현감 이원춘(?~1597)을 만난다. 이원춘은 후에 남원성으로 들어가서 남원성전투(1597.8.12~15)에서 일본군과 싸운다. 구례에서 조선 수군 출정식을 가진다. 8월 5일 곡성에서 이순신은 거북선 돌격대장 이기남(?~?)을 만난다.. 2021. 4. 30.
[임진왜란53] 복직 후 달라진 이순신 - 선조 들이받다. [임진왜란53] 복직 후 달라진 이순신 - 선조 들이받다. 칠천량해전(1597.7.15~16)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일본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일본군은 처음으로 전라도로 진격해서 남원성을 점령(1597.8)했다. [칠천량해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 『난중일기 7월 18일』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하였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오전 10시께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어떻게도 의견을 정할 수가.. 2021. 4. 30.
[임진왜란52] 남원성전투 [임진왜란52] 남원성전투 ‘임진왜란은 일본과 호남과의 대결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바다에서 일본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조선을 점령한 후에 호남을 지배할 예정이었던 일본의 고바야카와가 금산을 점령하고 전주로 진격하려고 할 때, 웅치(1592.7.7)와 이치(1592.7.8)에서 황진 장군(1550~1593)이 물리치면서 호남이 지켜졌다. 그리고 호남의 병사들이 권율과 함께 북상하여 독산성 전투(1592.12)에서 승리하고 행주대첩(1593.2)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이후 호남은 조선이 전쟁을 하는 기반이 되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배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호남이 지켜진 것은 호남 사람들이 열심히 싸운 것도 있지만,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 수.. 2021. 4. 29.
[임진왜란51] 원균 은둔설? [임진왜란51] 원균 은둔설?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칠천량 해전(1597.7.15)의 주인공 원균... 이순신의 한산도의 승리보다 더 큰 패배를 안겨준 장수... 그는 과연 칠천량에서 죽었을까? 박정희가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우고 자신을 이순신과 등치시키려는 것은 솔직히 코메디라고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려운 가운데 권력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을 연개소문과 등치시키려 했다. 어찌보면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니 박정희는 차라리 연개소문을 존경한다고 했어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후 연개소문.. 2021. 4. 28.
[임진왜란50] 칠 천 량 해 전 [임진왜란50] 칠 천 량 해 전 원균도 부산을 공격하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선조의 무리한 명령과 권율이 곤장까지 때리니까 패할 것을 알고 출전한 것이다? (이렇게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원균에게 출정을 강요하는 선조] 선조실록 1597년 7월 10일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대로 시행하라. 원균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침] 선조실록 1597년 7월 11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조정의 대신들 중에 나쁜 .. 2021. 4. 28.
[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최근 원균의 후손들과 원균의 고향 평택시에서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작업이 있다. 원균이 재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인가? 원균은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 판옥선 74척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1만여명의 병력을 해산하고 튄 인물로, 일본군이 경상도에 쉽게 상륙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인물이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 무능력함도 보여주었고,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을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원균을 재평가해서 띄우려는 어처구니 없는 평택시에 대한 기사 한국사를 가르치는 선배 중에 1881년에 청나라 무기를 배우기 위해 청나라로 건너갔던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의 고손자인 분이 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 2021. 4. 28.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조선, 명나라, 일본은 휴전기간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조선은 배제된 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명나라측에서는 심유경(1526~1597)이 나섰고, 일본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회담에 응했다. 이때 심유경은 명나라 사신 2명과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7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7가지 요구사항]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명나라와 일본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관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감합무역 :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대신이 통교를 서약.. 2021. 4. 28.
[역사 속 외국인1] 호머 헐버트 해당 영상은 8분이 조금 넘는 짧은 영상이기 때문에 한번 보시길 권한다 호머 헐버트(1863~1949) 수능 한국사와 관련되어 헐버트는 많은 부분 언급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학은 원산학사(1883)인데, 최초의 근대적 관학은 육영공원(1886)이다. 이 육영공원에서는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의 상류층 자제들에게 영어를 강의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외국인 선교사가 헐버트였다. 그리고 헐버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세계 지리 역사교과서인 『사민필지』(1891)를 만든 인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운동 일환으로 고종은 미국에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했다(1905년). 이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있는 ‘거중조정’(제3자적 입장에서 분쟁당사국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는 것)을 믿고 취한 조치..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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