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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37] 행 주 대 첩 - 한강으로 화살을 배달하는 이순신?│황현필 한국사 권율의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7) 김시민의 진주대첩(1592.10) 권율의 행주대첩(1593.2) 권율은 늦은 나이(46세)에 문과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56세로 광주 목사였다. 용인전투에서 말도 안되는 패배를 당했지만 권율은 병력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이후 황진과 이치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호남을 지켰고 관찰사로 승진하게 된다. 권율의 1만 병력이 한양을 향해 북상하다가 독산성에 주둔하였는데, 우키타 히데이에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때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1593.1.9)는 소식을 듣고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공격할 때 힘을 보태기 위해 한양으로 북상한다. 권율은 관악산 근처에 선거이(1550~1598)에게.. 2021. 4. 25.
[임진왜란36] 권율 장군. 구국의 영웅? 최고의 무장?(Feat. 독산성 전투), 13분순삭ver. │황현필 한국사 권율이 진정 구국의 영웅인가? 최고의 무장인가? 선무1등공신의 자격이 있는가? 임진왜란 발발 이후부터 행주대첩의 승리까지 권율은 뛰어난 활약을 한다. 그런데 행주대첩 이후에 도원수가 된 이후에는 큰 전투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어찌 저런 자가 도원수일까?’라는 언급도 있다. (원래 이순신의 인물평은 냉정하기로 유명하다. 이순신은 그러한 냉정함을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솔직히 권율은 뛰어난 무인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뛰어난 지휘관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집안이 금수저 집안이었다. 아버지인 권철(1503~1578)이 영의정이었으니 권율은 젊은 시절에 공부를 게을리하고, 술과 여색을 밝히고 여행다니는 거 좋아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40세까지 백수임에도 불.. 2021. 4. 25.
[임진왜란35] 걔네들 기준 임난 3대 승리 중 으뜸 - 벽제관 전투│황현필 한국사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1592년 4월) 두 달만에 평양성을 빼앗겼다가(1592년 6월) 6개월만에 평양성 탈환하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에서 1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이 1만여 명의 수급에는 상당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양성에는 순왜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되어 이여송이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부대가 절실했던 조선의 조정에서 이여송을 변호해 주는 일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한 고니시의 전투목록은 아래와 같이 임진왜란 초기의 대부분의 전투를 고니시의 부대가 치렀으며, 그 와중에 조금씩 병력의 손실이 생겼을 것이다. 18,700명의 병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으로 살아돌아갈 때 불과 5.. 2021. 4. 24.
[이덕일의 한국통사]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 사람인가? 북망민족으로 중국을 침략해서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만주와 중원을 장악한 여진족의 금나라... 금나라 시조는 고려 사람인가?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본기〉는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는 고려 사람이다. 처음에 고려에 왔을 때 이미 나이가 60여 세였다. 그 형인 아고내(阿古迺)는 부처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러 있으면서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며 금나라 시조가 고려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금국지(大金國志)》의 〈금국초흥본말(金國初興本末〉(금나라가 처음 흥한 본말)은 시조에 대해 “본래 신라인으로 성씨는 완안(完顔)씨이다. 완안은 중국어로 왕과 같은 말이다”라고 적고 있다. 여진족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것은 금나라 시조가 신라에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은 고려를 섬겼지만 .. 2021. 4. 24.
[이덕일의 한국통사]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 요나라 왕실은 고구려의 후예인가? 북방민족으로 중원을 위협한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진 ‘요’나라는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에서 ‘발해’를 무너뜨린 나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요나라를 세운 ‘야율씨’가 고구려의 ‘고씨’의 후예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요나라 왕실은 고구려의 후예인가? 1986년 내몽골 통료(通遼)시 내만기(奈曼旗) 청룡산에서 요나라 진국공주(陳國公主, 1000~1018) 야율씨의 부부 합장묘와 가 발견되었다. 에 따르면 공주의 성씨는 요나라 황성(皇姓)인 야율(耶律)씨로서 경종(景宗)의 손녀이다. 그 아버지는 경종과 황후 소작(蕭綽)의 둘째아들이자, 요 성종(聖宗)의 동생인 진진국왕(秦晉国王) 야율융경(耶律隆慶, 973~1016)이다. 진국공주는 부마도위 소소구(蕭紹矩)에게 시집갔으나 그만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2021. 4. 24.
[임진왜란 34] 평양성 탈환전(이여송+류성룡+서산대사vs고니시) │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 중 평양에서의 4차례 전투가 있었다. 제1차 평양 전투 - 1592년 6월 15일(왕성탄 전투, 평양성 점령당함) 제2차 평양 전투 - 1592년 7월 17일(조승훈 패배) 제3차 평양 전투 - 1592년 8월 1일(조선군 패배) 제4차 평양 전투 - 1593년 1월 8일(이여송 승리, 평양성 탈환) 제1차 평양 전투(1592.6.15) 선조는 대동강까지 진격한 일본군을 보고 의주까지 도망가면서 윤두수(1533~1601), 김명원(1534~1602), 이원익(1547~1634)에게 방어하라고 시켰다. 평양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쪽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벽도 잘 수축되어 있었다. 수비를 하던 조선군이 의외로 선제공격을 하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병사들이.. 2021. 4. 24.
[임진왜란33] 역전되는 전세, 요동 기병의 고니시 공격 │황현필 한국사 [8분 정도까지 복습모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하고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한다(5월 3일에 한양을 빼앗김). 원래 일본군은 한양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가 도망가면서 전쟁이 꼬이게 되었다. 한양까지만 대비하고 건너온 일본군은 한양 이북의 지도나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진격하는 데에는 40일이 걸렸다(6월 15일). 명나라 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약간의 식민사관에 묻혀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한 전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고니시가 평양 이북으로 진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부대 감소와 사기 저하 보급로 끊김 의병에 대한 두려움 명군 참전에 대한 두려움 추위에 대한 공포 한편 요.. 2021. 4. 24.
[이덕일의 한국통사] 단군의 건국이념은 천손사상을 뜻함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과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리라는 제세이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천손사상과 다름 일본인들은 단군을 승려 일연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한의 강단사학도 아직까지 단군을 신화로 보고, 고조선은 아무리 빨라야 서기전 10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논리로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을 부인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을 남한의 식민사학자들이 그대로 추종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무리 중국을 사대했어도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것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었다. 『삼국유사』의 가장 첫 부분에는 왕의 계보를 적어놓은 왕력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이 왕력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조’의 ‘동명성왕은 추모왕이라고도 한다.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써 놓았다. 고구려는 단군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라는 말이다. 부여도 마찬가지로 .. 2021. 4. 21.
[이덕일의 한국통사] 일본이 단군은 가짜라고 떼쓰는 진짜 이유? 삼국사기 동국통감 제왕운기 단군왕검을 인정하는데 일본이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를 추종하는 교원대 #8 고조선에 대해서... 중국 시진핑이 미국의 트럼프를 만나서 옛날에 북한이 중국의 영토였다고 말한적이 있는데,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한사군의 위치가 북한지역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만조선의 위치, 낙랑군의 위치가 어딘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들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중국 하북성 일대라고 보고 있는데,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쟁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절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 논쟁들은 ‘고조선, 단군조선이 언제 건국했느냐’는 문제와 ‘고조선의 서쪽 강역, 즉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어디냐’는 문제,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 2021. 4. 21.
[임진왜란32] 함경도를 탈환하다 (Feat. 북관대첩비) 끝까지 보셔야 할 영상 │황현필 한국사 정문부 장군의 하이라이트는 북관대첩(1592.9~1593.2)인데 이 북관대첩은 정문부가 함경도를 수복하면서 승리한 여러 전투를 총칭한 명칭이다. “함경도의 적세는 다른 도보다 강합니다. 안변에서 육진까지 모두 왜장을 배치하고 각기 3~4백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또 민간에 사람을 내보내 필요한 물건들을 날마다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요해처에는 복병을 많이 배설하여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살육과 약탈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모두 분발할 것을 생각하면서 애타게 중국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길주 이북의 상황이 궁금한 일본군은 길주에서 최정예병력 92명을 경성 근처까지 보내보지만, 정문부가 92명을 다 잡아서 죽여버린다(경성전투, 1592.9.16). 장평(장..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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