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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2] 이순신의 조상, 출생, 어린시절, 청년기와 과거 합격 │황현필 한국사 이순신은 ‘덕수 이씨’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덕수 이씨의 시조인 이돈수가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입 때 출정했던 것으로 보아 무인의 기질을 타고 났다는 말도 있다. (10대조 이양준도 무관이었음) 이순신의 5대조 이변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뛰어난 인재였다. 후에 선조가 유성룡에게 이순신의 집안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유성룡은 이렇게 대답했다. “성종 때 이거의 증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선조가 금방 알아들었을 정도로 ‘이거’라는 사람은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당시 임금이었던 중종이 죽었을 때 아들 이정을 결혼시키고 잔치를 베풀어서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덕수 이씨와 초계 변씨는 아주 가까운 집안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사회는 ‘모계중심사회’였다. 예를 .. 2021. 4. 6.
[임진왜란11] 이순신 │황현필 한국사 이순신은 어떤 인물인가?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준 인물... 혹시 외계인은 아닌가? 아니면 먼 미래에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 타임머쉰을 타고온 인물은 아닐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의 영상은 ‘이순신 장군의 프롤로그’로 작성하였다. 1. 23전 23승 무패의 전설을 만든 인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은 어느 정도였는가? 그 당시 조선의 조정은 ‘조선의 육군이 강하고 수군이 약하니 육지로 끌어들여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우리 역사상 동북아 바다를 장악한 인물은 9세기 통일신라의 ‘장보고’(787~846)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 들어선 이후 14~16세기의 동북아 바다는 왜구(倭寇)가 판을 치고 있었다. 당시 동북아 최.. 2021. 4. 5.
[이덕일의 한국통사] 중국이라는 나라, 개념 탄생의 비밀 동이족에서 갈라져 나온 하화족이 생겨난 배경 중국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한 중국인도 모르는 중국 고대사 #6 흔히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동이족이라는 것은 ‘예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숙신’을 동이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 북경대 총장까지 지낸 부사년이라는 학자는 ‘숙신’을 ‘고조선의 다른 명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말갈족의 후예가 만주족과 여진족인데, 이 말갈족의 선조를 숙신이라고도 한다. 나아가 거란족과 같은 민족도 동이족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이족은 커다란 민족의 개념으로 볼 수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황제 집단과 치우 집단이 싸우다가 (초기에는 치우 집단이 승리를 했는데) 최종적으로 황제 집단이 승리했으며, 그 치우 집단의 한 갈래를 동이족이라고 본다. 중국에 치우의 무덤이라고 하는 치우총이 여러 군데 있는데 ‘중화삼조당’(중국.. 2021. 4. 3.
[이덕일의 한국통사] 사마천이 왜곡한 중국 시조 황제의 비밀 / 황제 아들이자 김유신 시조 소호릉 방문 #5 동이족에 대해서... 동이족이 뭐냐고 물어보면 선뜻 답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고대 역사서 중에 고대 4사(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진수가 쓴 삼국지와 후한서) 중에 삼국지와 후한서에 동이열전이라는 구분이 나온다. 동이열전 속에 부여, 고구려 같은 나라들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중국 사람들이 볼 때 ‘동이’는 우리의 부여, 고구려, 예, 읍루라든지... 이런 우리의 고대 국가들을 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중국의 ‘백도백과’라든지 중국의 사이트에서 ‘동이’를 찾아보면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던 고대 민족이다.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고대 중국 역사서에서 말하는 동이는 부여, 고구려 등의 나라들인데) 지금.. 2021. 3. 31.
[임진왜란10] 임진강&대동강 방어전(광해군 분조를 이끌다)-절대순삭ver. │황현필 한국사 일본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서둘러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왕을 잡게 되면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일본의 100여년의 전국시대 전쟁의 패턴은 성주가 항복하거나, 할복하면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다. (최후까지 항전하면 그 지역은 철저하게 도륙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백성들은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처음에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성주가 도망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인 선조는 일본군의 허를 찔러 가장 용감하게 도망쳤다. (이것이 임진왜란에서 선조가 한 가장 뛰어난 활약이었다... 손자병법의 36계 줄행랑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가장 충격과 멘붕을 선사했다...) 선조가 도망친 이후에 일본군은 멘붕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양을 점령한 이후에 곧바로 북진하지 못한 것은 이순.. 2021. 3. 31.
[이덕일의 한국통사] 8천년 고조선 뿌리 요하문명 홍산문화 하가점 하층문화 상층문화 신석기 시대 신락문화 앙소문화에 관한 개념 정리 일본이 조선을 침략 도구로 사용한 요하문명 #4 요하문명과 홍산문화에 대하여 (문명은 문화보다 조금 큰 개념으로) 요하문명은 지금의 하북성, 내몽골, 요녕성, 그것보다는 조금 더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이쪽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신석기 문화부터 청동기 문화로 이어지는 고대 문명이다. 그리고 이 요하문명의 속에 홍산문화라는 작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홍산문화는 그 중의 한 문명으로 요하문명 속에 홍산문화라는 하나의 작은 문화가 요하문명의 한 틀을 이루고 있다. 요하문명은 서기전 8천년에 시작하는 신락문화부터 시작하는데, 홍산문화는 서기전 5천년 전에 시작하는 문화이다. 이 문화가 나중에 우리 고조선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이기에 대단히 중요한 문명이자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내몽골에 가면 내몽골의 적봉이라는 도시가 있다. ‘적’자가 붉을 적(赤)자인.. 2021. 3. 30.
[임진왜란9] 선조의 파천과 한강 방어전 (패장은 승진, 승장은 참수?) 도대체 궁궐은 누가 불태운거야? │황현필 한국사 지도에 등장하는 별표는 선조가 도망가면서 세운 임시 수도라고 할 수 있다. 부산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밀양을 지나 탄금대에서 신립을 격파한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와 (추풍령에서) 합류한 제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사실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1선발 고니시가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부하를 가토에게 제공해준다. 그런데 가토가 허를 찔러서 새벽에 먼저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뒤통수를 맞은 고니시는 기병만 데리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한양에서는 이미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한 직후에 선조는 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두수 같은 관료들에게 이미 튈 준비를 하라고 해 놓고 모른척 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회의를 하게 된다. 이때 파천을 주장하는 이산해(1539~1609)와 목숨걸고 싸우기를 주장.. 2021. 3. 27.
[이덕일의 한국통사] 3세기 일본 천황가 발상지 사이토바루 고분군...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임나일본부설 폐기돼야 #3 [이덕일의 한국통사] 3세기 일본 천황가 발상지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김해 지역에서 나오는 가야 유물과 동일 북한학자 김석형 분국설로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임나일본부설 폐기돼야 #3 일본 식민사학의 주요 구조 중의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오늘날 남한의 강당사학자들은 겉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은 다 극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임나일본부설의 요체는 ‘가야가 임나’라는 것이다. 노태돈이라는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라는 사람은 ‘왜의 세력이 가야에서 단기적으로 군사솰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는 아니었다’, ‘ 영역 지배는 없었다’ 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외국의 군대가 다른 나라의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하는 것을 뭐라고 이해해야 하나? 외국군인 야먀토왜의 군사가 가야에 .. 2021. 3. 22.
[임진왜란8] 탄금대 전투 - 신립은 대체 왜? 이와중에 혼자 살아남은 1인? (아~조령과 문경새재) │황현필 한국사 조선에 출정한 일본의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서 밀양을 거쳐 대구를 격파하고 상주로 진격하여 조령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제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경주를 거쳐 죽령으로전진하고 있었으며, 제3선 발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는 김해를 공격하면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역제도는 오랜 기간 평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국방력은 약하지 않았다. 세조가 만든 보법제는 3인 1조로 구성되었으며, 한 명이 정군으로 선정되면 나머지 두 명의 경비를 충당하는 체제였다. 조선이 기본적으로 양인개병제였으나 양반과 상인, 중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병사로 차출되지 않았으며, 농민들만 병사로 차출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병농일치). 당시 군역 말.. 2021. 3. 21.
[임진왜란7] 상주 전투 - 생존왕 이일 (20분 순삭 ver.) │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에게 털렸던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의 문제였지,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인물들은 우리가 기억해주고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동래성 전투 직후의 상황을 알려면, 당시 경상도를 지키고 있는 육군과 수군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경상도를 책임지는 관찰사는 김수였다. 육군에는 경상좌병사 이각이었고, 경상우병사는 당시에 김성일로 교체되는 시기였다. 수군은 경상좌수영 박홍과 경상우수영 원균이었다. 박홍은 바다에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동래성에 합류했다가 도망쳤으며, 원균은 판옥선 70여척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도망쳐서 동래성 전투 당시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부산성(정발 장군 전사)과 다대포(윤흥신 장군 전사)가 함락된 후 일본군.. 2021.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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