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임진왜란 발발(1592년 4월) 두 달만에 평양성을 빼앗겼다가(1592년 6월) 6개월만에 평양성 탈환하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에서 1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이 1만여 명의 수급에는 상당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양성에는 순왜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되어 이여송이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부대가 절실했던 조선의 조정에서 이여송을 변호해 주는 일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한 고니시의 전투목록은 아래와 같이 임진왜란 초기의 대부분의 전투를 고니시의 부대가 치렀으며, 그 와중에 조금씩 병력의 손실이 생겼을 것이다. 18,700명의 병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으로 살아돌아갈 때 불과 5~6천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고니시의 주요 전투 목록]
부산성 전투(1592.4.13)
동래성 전투(1592.4.15)
상주 전투(1592.4.25)
충주 전투(1592.4.28)
한양 점령(1592.5.3)
개성 점령(1592.6.1)
평양 점령(1592.6.14)
당시 한양의 총사령관은 우키타 히데이에(1572~1655)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는데, 명나라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려는 생각을 한다.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한양을 쉽게 적에게 내주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남하하는 명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한양을 포기하면 곧장 부산까지 후퇴해야 할 것이며, 그러면 함경도에 있는 가토가 고립될 것이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일본 전국시대를 통털어 3대 무장으로 손꼽힐 정도이고, 풍부한 전투경험을 갖고 있는 노장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때 “해뜨는 나라의 서쪽을 다카카게에게, 동쪽을 이에야스에게 맡기면 태평할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결국 고바야카와의 2만과 우키타의 2만이 남진해 내려오는 이여송의 부대와 만난 전투가 일본에서 임진왜란 3대 전투 중 하나인 벽제관 전투(1593.1.27)이다.
이여송은 먼저 부장 사대수(?~?)와 고언백(?~1609)이라는 조선 장수를 먼저 앞장세워 동태를 파악하게 하였다. 이여송의 생각으로는 평양성 점령에서는 남방의 절강성 부대가 활약했으니, 한양을 점령할 때에는 요동의 기병이 할약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병을 몰고 빠르게 한양으로 향한 것이다. 이여송은 곧바로 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 사대수의 부대가 여석현에서 일본군과 교전해서 백 여명의 일본군의 수급을 베게 되었는데 이후 일본군을 얕잡아 보고 여석현 고개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던 고바야카와와 우키타의 부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 사대수의 부대가 후퇴하는데 우키타의 부대가 우회해서 사대수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뒤이어 내려오던 이여송의 부대는 고바야카와의 부대가 우회하여 공격하게 되어 이여송은 후퇴하는 사대수의 부대와 뒤이어 내려오는 명나라 군대에 의해서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일본의 『태합기』에는 명나라 10만 병력을 이겼다고 나오며, 일본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전투가 바로 이날의 ‘벽제관 전투’이다.
[일본의 임진왜란 3대 대첩]
1. 벽제관 전투(1593.1.27)
2. 울산성 전투(1597.12.23)
3. 칠천량 해전(1597.7.15)
“사대수가 우리 장수 고언백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정탐하던 중 경성의 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을 벽제역 남쪽 여석현에서 만나 1백여 급은 베었다. 제독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친병인 기병 1천여 명과 더불어 달려가면서 대군을 계속 출동시키도록 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
“그러나 적이 먼저 많은 군사를 고개 뒤에 매복시키고는 단지 수백 명만 고개를 지키게 하여 약세를 보였다. 제독이 즉각 군사를 지휘하여 전진시키니, 적이 고개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군사들이 채 교전하기도 전에 적병이 갑자기 뒤에서 일어나 산 위에 진을 쳤는데 거의 1만여 명이 되었다. 명나라 군사는 단검에 기마뿐이었고 화기가 없었으며, 길이 험하고 진흙이 쌓였으므로 제대로 말을 달리지 못하였다. 이에 적이 긴 칼을 휘두르며 좌우에서 돌격해 들어오니 그 예봉을 대적할 수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제독의 휘사 이유승 및 용사 80여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제독이 사대수에게 호위를 맡게 하고 길을 뚫고 빠져 나갔다. 그 뒤 대군이 잇따라 이르니 적이 바라보고는 도로 달아났다. 제독이 저녁에 파주로 돌아와서 이유승의 사위인 왕심대를 불러서 등을 어루만지고 통곡하고 말하기를, “좋은 남아였는데 나를 위해 죽었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벽제관에서 크게 패한 이여송은 이후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패배로 쫄아버린 듯 하다) 개성으로 돌아가서 더이상 나오지 않게 된다. 이때 류성룡이 이여송을 설득해 보지만 이여송은 병을 핑계로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제독 이여송은 일어서서 장막 밖으로 나가려 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좌우에 늘어섰다. 나는 힘써 간하기를 “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에게는 항상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형세를 보아서 다시 나아가셔야지 어찌 가볍게 움직이려 하십니까?”라고 하니, 이여송은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어제 적을 많이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지만, 다만 이곳은 비가 온 뒤 진창이 되어서 군사를주둔시키기에 불편하므로 동파로 돌아가 군사를 쉬게 하였다가 진격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중략...)
나와 여러 사람들이 힘껏 반대하니, 제독은 자기가 이미 본국에 상주한 글의 초고를 내어 보이는데, 그 가운데 ‘서울에 있는 적병의 군사만 20여만 명 되니,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대적할 수 없으며...’ 하는 구절이 있었고, 또한 말미에은 ‘신의 병이 대단히 심하오니 다른 사람으로 임무를 대신하게 해주소서.’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적병이 매우 적은데 어떻게 20만 명이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알수 있겠는가? 곧 너희 나라 사람이 한 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핑계의 말이었다.
『징비록』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장제작이 제독에게 가장 강력하게 군사를 퇴각하자고 권했는데, 우리가 굳이 반대하고 물러가지 않는다고 하여 순변사 이빈을 발길로 차며 물러가라고 꾸짖었는데 그 말소리와 낯빛이 모두 사나웠다. 『징비록』
한편, 명나라가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병력을 몰고 수원 독산성에 머물고 있다가 한양 옆에 행주산성까지 명나라 군대와 호응하기 위해 3천 병력을 몰고 올라와 있었는데 명나라가 퇴각하면서 고립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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