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의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7)
김시민의 진주대첩(1592.10)
권율의 행주대첩(1593.2)
권율은 늦은 나이(46세)에 문과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56세로 광주 목사였다. 용인전투에서 말도 안되는 패배를 당했지만 권율은 병력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이후 황진과 이치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호남을 지켰고 관찰사로 승진하게 된다.
권율의 1만 병력이 한양을 향해 북상하다가 독산성에 주둔하였는데, 우키타 히데이에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때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1593.1.9)는 소식을 듣고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공격할 때 힘을 보태기 위해 한양으로 북상한다.
권율은 관악산 근처에 선거이(1550~1598)에게 4천 병력을 주고, 자신은 처영대사(?~?), 조방장(참모) 조경(1541~1609)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3천 병력으로 주둔한다. 이때 요동 기병을 앞세우고 내려오던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개성으로 돌아가면서 권율은 고립되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권율에게 일본군 3만의 병력이 쳐들어오게 된다.
당시 권율은 목책을 만들자는 조방장(참모) 조경의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권율이 행주성에서 잠깐 출타한 틈을 타서 조경이 행주산성에 목책을 이중으로 쌓는다. 권율이 돌아와서 목책을 보고 노발대발했지만. 만약 목책이 없었으면 권율의 3천 병력은 전멸했을 것이다. 나중에 권율은 조경의 공을 정확하게 보고하였고, 전쟁 후에 조경이 3등공신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행주산성은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 창릉천이 흐르고 있어서 천혜의 해자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쪽과 서쪽만 지키면 되는 곳이지만 절대로 후퇴할 수 없는 배수진이 되는 셈이었다. 행주대첩(1593.2.12)에는 당시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7개 부대가 총 공격한 전투였다.
1군 : 고니시 유키나가
2군 : 이시다 미츠나리
3군 : 구로다 나가마사
4군 : 우키다 히데이에
5군 : 킷카와 히로이에(1561~1626)
6군 : 모리 히데모토(1579~1650)
7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조선군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적의 3만의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각 군이 각개적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이었다. 행주대첩에서는 비격진천뢰, 신기전, 변이중(1546~1611)의 화차 등이 활용되었다. (변이중의 화차는 40개의 승자총통을 3면으로 장착한 것이었는데, 행주대첩에는 40대가 있었다고 한다)
1군과 2군이 공격해왔으나 비격진천뢰 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물러간다. 이후 3군의 구로다는 나름 공성장비를 준비해서 공격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순신이 선물했던 천자총통으로 공성장비를 격파하게 된다. 4군의 우키타가 무모하게 총공격을 감행했는데 조선의 화력이 우키타 부대에 집중되면서 우키타는 화살(혹은 총탄)에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군은 화공으로 공격했으나 나름 물이 잘 준비되어서 적이 물러갔다. 6군은 북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는데 1목책이 뚫리게 되었다. 이곳을 지키던 처영대사와 승병들이 일본군과 백병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승병들은 먼저 석회가루와 잿가루를 일본군에게 던지고 달려들었다고 한다. 7군의 고바야카와 역시 1목책을 뚫었고 조선군은 사력을 다해서 막아내었다. 이때 권율이 자신의 투구에 물을 따라서 부하들을 먹였다고 한다. [권율 장군이 머리는 언제 감았을까?] 행주산성에는 민간인이 살기 어려운 곳이라 아낙네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옮겼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화살이 떨어졌음을 직감하고 총공격을 감행하던 고바야카와는 갑자기 조선군에서 다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데, 한강에 조선의 수군이 판옥선을 거느리고 화살 2만개를 보급해 주는 것을 보고 이순신인줄 알고 후퇴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 화살을 건네준 수군은 경기도 수사 이빈(1537~1603) 아니면 충청도 수사 정걸(1514~1597)이었을 것이다. 3천의 병력으로 적의 3만 대군을 물리친 싸움이 바로 행주대첩이다.
“처음에 평양이 회복되자 여러 장수들이 많이 경성으로 모여들었다. 중국군이 개성부에 진주하자 우리나라 장수들은 차례로 전진시켜 함께 기각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그의 군사 4천 명을 반으로 갈라 절도사 선거이로 하여금 거느리고 양천강 언덕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정병 2천 3백명을 거느리고 수원의 독성으로부터 고양군 행주의 성산으로 옮겨 진을 쳤다. 12일 새벽에 척후가 계속해서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으로 나뉘어 각각 흉기와 백기를 들고 홍제원으로부터 행주를 향해 오고 있다’ 하였다. 권율이 즉시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는 영을 내리고 대에 올라 바라보니 5리쯤 떨어진 들판에 적의 무리가 가득했다. 선봉 1백여 기가 점점 접근해 오더니 조금 있자 1만여 기병이 들을 뒤덮고 와서 일시에 포위하고 바로 돌격해왔다. 우리 군사들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 및 진천뢰ㆍ지신포ㆍ대중발화 등 각종 화기를 연달아 쏘았는데도 물러가지 않고,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진격했다. 묘시로부터 유시에 이르도록 세 번 진격하고 세 번 물러갔는데 적의 죽은 자는 수십 명이었고 부상한 자도 백여 명이 되었다. 적이 마른 풀에 불을 붙여 바람을 이용, 성을 불태우면 성중에서는 물을 부어 이것을 껐다. 처음에 승군으로 하여금 서북쪽에 있는 자성의 한 쪽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에 승군이 조금 물러나자 적들이 고함을 치면서 몰려 들어오니 군중이 흉흉하였다. 권율이 칼을 빼어들고 독전하자 여러 장수들이 죽기로써 힘껏 싸우니 적은 포위를 풀었다. 적의 시체를 네 곳에 모으고 마른 풀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는데 시체 타는 냄새가 10리까지 뻗쳤다. 아군이 남은 시체를 거두었는데 참획한 것이 1백 30여 급이었다.”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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