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39] 한양 탈환, 쟤들 살려 보내야해?(feat.정걸의 용산 식량기지 박살과 고언백의 노원평 전투)│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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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39] 한양 탈환, 쟤들 살려 보내야해?(feat.정걸의 용산 식량기지 박살과 고언백의 노원평 전투)│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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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을 빼앗기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후퇴하였고, 나머지 일본군도 한양으로 모여들어서 한양에는 5만이 넘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한양에 있을 수 없었다. 왜 그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을까?

 

1. 군수 물자 및 보급품 부족 : 이미 이순신에 의해서 남해의 제해권이 장악되고 한양에 남아 있는 일본군은 군수품이나 보급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 일본군의 막대한 병력 손실 : 여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일본군은 22만에서 1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10만 명이 사망한 것이다).

 

3. 장기전에 지치고 병든 일본군

 

4. 명군의 참전 : 명나라 해안을 노략질하면서 경험한 무능한 명나라 군사들이 아니라 요동과 절강성의 정예부대를 경험한 후에 일본군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5. 행주대첩의 패배 : 3만이 넘는 병력으로 3천 정도의 행주산성을 점령하지 못하면서 사기가 더욱 떨어졌다. 오히려 권율이 명나라의 부대와 합세해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6. 노원평 전투의 패배 : 지금의 노원구 근처 불암산과 수락산에서 고언백(?~1609)이 사명당 유정과 손을 잡고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는데, 양주까지 약탈하러 간 일본군이 공격을 받았다. 어떤 기록에는 행주산성에서 죽은 일본군보다 노원평에서 죽은 일본군이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7. 충청수사 정걸의 용산 보급창고 공격 : 충청수사 정걸이 한강을 거슬러 와서 일본군의 군량창고인 용산을 공격해 버렸다.

 

8. 이순신의 웅천왜성 공격 소식 : 이순신이 웅천왜성을 공격했다는 소식은 향후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근거지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9. 황진 장군의 안성 죽주산성 점령 : 황진 장군이 안성을 점령한 후에 이천과 용인을 노린다는 소식은 일본군에게 심한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러다가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10. 토요토미의 조선 친정 포기 : 원래 한반도를 장악하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한반도로 건너오기로 했었는데, 토요토미가 (이순신이 무서웠는지)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포기했다. 일본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렇다고 일본군이 먼저 한양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명나라에서 먼저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가 회담의 책임자가 되었다.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기로 이여송이 약속하는 바람에 패잔병처럼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본군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1593419일에 한양을 비우고 퇴각하였는데, 함경도에서 잡은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조선 백성 1,000명을 인질로 데리고 심유경과 함께 남쪽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혹시나 도중에 조선군이 공격할지 모르니 명나라가 후퇴하는 일본군의 안전을 보호하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류성룡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곤장까지 맞을 뻔하는 치욕을 당한다) 무능한 선조가 작전권을 바보같이 넘겨준 덕분이었다. 420, 조명연합군이 한양에 입성하게 된다.

 

나도 명나라 군사를 따라서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성 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보니 백 명에 한 명 꼴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그 살아있는 사람도 다 굶주려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안색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들이 곳곳에 그대로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 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코를 막고 지나가는 형편이었다. 관청과 사갓집 할 것 없이 몽땅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남산 아래 일대에 왜적이 거처하던 곳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와 세 대궐 및 종루, 각사, 관학 등 큰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소공주 댁은 역시 왜적의 장수 우키다가 머물러 있던 곳이었으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징비록』

 

하루는 밤에 큰 비가 내렸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밤중에 내 숙소 곁에 모여 신음소리를 냈는데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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