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중 평양에서의 4차례 전투가 있었다.
- 제1차 평양 전투 - 1592년 6월 15일(왕성탄 전투, 평양성 점령당함)
- 제2차 평양 전투 - 1592년 7월 17일(조승훈 패배)
- 제3차 평양 전투 - 1592년 8월 1일(조선군 패배)
- 제4차 평양 전투 - 1593년 1월 8일(이여송 승리, 평양성 탈환)
제1차 평양 전투(1592.6.15)
선조는 대동강까지 진격한 일본군을 보고 의주까지 도망가면서 윤두수(1533~1601), 김명원(1534~1602), 이원익(1547~1634)에게 방어하라고 시켰다. 평양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쪽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벽도 잘 수축되어 있었다. 수비를 하던 조선군이 의외로 선제공격을 하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병사들이 ‘왕성탄’이라는 곳으로 걸어서 대동강을 건너게 되는데, 이것을 본 고니시가 그곳을 통해서 대동강을 건너게 된다. 일본군이 건너는 것을 본 조선군은 곡식을 다 불태우고 무기를 대동강에 던져버리고 후퇴해 버린다.
제2차 평양 전투(1592.7.17)
요동의 기병 3~5천 데리고 온 명나라의 조승훈이 조선병력과 합세해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대패하였다. [임진왜란33] 참조
제3차 평양 전투(1592.8.1)
조선군이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한 전투이다. 이때 김응서(1564~1624)와 상주전투의 생존왕 이일(1538~1601), 이원익 등이 참여하였는데, 김응서의 부대만 공격하다가 7천명이 전사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아마도 선조가 빨리 평양성을 탈환하라고 재촉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공격했던 것 같다.
드디어 명나라의 대병력이 조선으로 건너오게 된다. 명나라의 참전이 늦어진 이유는 마침 몽골 근처에서 있었던 ‘발배(보바이)의 난’(1592년)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여송이 4만 3천의 병력을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왔고, 곧바로 8천의 병력이 합류하였다. 그리고 송응창(1536~1606)이라는 명나라 문신관료가 총책임자로 함께 건너왔다.
명나라 5만 천여명의 병사와 서산대사 휴정이 묘향산에서 데리고 온 1,500병력, 그리고 사명대사 유정이 금강산에서 1,000병력, 조선의 관군까지 합하면 거의 6만에 가까운 병력이 평양성을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제4차 평양 전투(1593.1.8)
이여송은 우선 사대수(?~?)라는 사람을 보내서 고니시와 협상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협상장에 나오는 일본군을 사대수가 매복해 있다가 죽이게 되었고, 고니시는 명나라와 싸움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니시는 황해도 지역의 일본 병력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시 각기 지방에서 자신의 병력을 거드리고 출전했던 일본의 다이묘들이 불리한 평양성으로 합류하기를 꺼려했다. 고립된 고니시에게 부하들이 평양성을 버리고 후퇴하자고 했으나 고니시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1593년 1월 6일 평양성 앞에 이여송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양성 전투에서는 칠성문, 보통문, 함구문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월 8일 조명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자랑하는 대포(불랑기자포, 사정거리 2천미터)가 평양성을 향해 대포를 쏘아댔고, 이여송에게 합류한 명나라의 남군(척계광의 절강병법으로 훈련된 남방 지역의 정예군)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여송은 후퇴하는 병사의 목을 베면서 가장 먼저 성벽을 오르는 자에게 은50냥의 상금을 걸었다. 이것은 당시 병사의 20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결국 일본은 중성을 포기하고 내성으로 후퇴하였다. 곧바로 내성으로 돌격했는데 일본의 조총으로 병력이 손실이 생기기 시작하자 명나라 군대가 일단 병력을 후퇴한다.
이여송은 고니시에게 ‘병력의 희생을 무릅쓰고 공격하면 전멸이다. 평양성을 빠져나갈 때 공격하지 않을테니까 빠져나가라’고 제안한다. 상황을 파악한 고니시도 평양성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애초에 1만 8천의 병력이었던 고니시의 부대가 평양성을 빠져나갈 때 5천 정도로 줄어있었다.
평양성을 빠져나갈 때는 공격하지 못하지만,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건 공격해도 되지 않았을까? 당시에 모란봉 근처를 지키던 이일은 후퇴하는 고니시를 추격하지 않았고, 오죽하면 명나라 장군이 이일의 목을 베려고 하기도 했다. 유성룡의 소수의 부대로 도망치는 고니시를 추격하도록 했다. 이시언(1557~1624), 정엽(1563~1625)이 소수의 병력으로 고니시를 추격해서 5~60명의 일본군을 죽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름 많은 병력을 갖고 있던 김경로(?~1597)가 유성룡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과 고니시의 대동강 탈출]
“다음 날 아침 명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 칠성문을 공격하였다. 적은 성 위에 올라 붉고 흰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항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대포와 불화살로 적을 공격하니 대포 소리가 땅을 울려서 수십 리 안에 산이 모두 흔들렸다...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등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개미처럼 성을 붙어 오르는데 앞 사람이 떨어지면 뒷 사람이 올라가니 후퇴하는 병사가 없었다. 적의 칼과 창이 성벽 위에서 아래를 향하여 나와 있는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의 바늘 같았다. 명나라 군대가 더욱 더 분투하니 적은 버티지 못하고 내성으로 달아났다. 칼로 베고 불로 태워 죽인 병사가 매우 많았다.” 『징비록』
“적이 성가퀴 사이로 좇아 나와 포석을 사용하여 항거하였는데, 제독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한 사람을 손수 베어 돌려 보이고 크게 소리치기를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 5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낙상지가 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오르고 절강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올라가 적의 기를 뽑아 버리고 명나라 기를 세웠다. 적이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후퇴하여 토굴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도 잇따라 올라갔다.” 『조선왕조실록』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밤마다 달아나 한양으로 돌아갔다. 기력은 쇠하고 발은 부르터서 절뚝거리며 갔다.
...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고 명나라 군대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 만약 유키나가(行長), 요시토시(義智), 겐소(玄蘇) 등을 잡았다면 한양의 적은 스스로 무너졌을 터이고, ... 『징비록』
어쨌든 평양성을 쉽게 탈환한 이여송은 자신감이 생겼고, 일본군을 얕잡아 보게 되었다. 이여송은 요동의 기병을 거느리고 한양으로 돌격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게 패하게 되고... 한양을 함께 공격하려고 한양 근처까지 와 있던 권율이 행주성에서 고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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