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32] 함경도를 탈환하다 (Feat. 북관대첩비) 끝까지 보셔야 할 영상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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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32] 함경도를 탈환하다 (Feat. 북관대첩비) 끝까지 보셔야 할 영상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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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장군의 하이라이트는 북관대첩(1592.9~1593.2)인데 이 북관대첩은 정문부가 함경도를 수복하면서 승리한 여러 전투를 총칭한 명칭이다.

 

 

함경도의 적세는 다른 도보다 강합니다. 안변에서 육진까지 모두 왜장을 배치하고 각기 3~4백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또 민간에 사람을 내보내 필요한 물건들을 날마다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요해처에는 복병을 많이 배설하여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살육과 약탈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모두 분발할 것을 생각하면서 애타게 중국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길주 이북의 상황이 궁금한 일본군은 길주에서 최정예병력 92명을 경성 근처까지 보내보지만, 정문부가 92명을 다 잡아서 죽여버린다(경성전투, 1592.9.16).

 

장평(장덕산 석정령) 전투(1592.10)는 양력 12월에 있었다정문부는 1,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길주로 향했다. 이때 정문부의 병력은 함경도 최정예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길주의 장덕산 근처에서 일본군 천여명이 마을을 노략질하다가 조선의 200여 기병의 공격을 받게된다. 이후 400명의 기병이 추가로 합류하면서 일본군은 도망치게 되는데 이때 정문부의 천여명의 기병이 등장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장덕산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장덕산 안에 있는 석정령이라는 계곡에 갇혀버린 일본군은 거의 모두가 얼어죽었다.

 

북관대첩비에 기록된 석정령 전투 : “적에게 끌려간 남녀백성과 말 100필을 포함한 가축을 모조리 되찾았으며, 군기 20여기, 16, 총탄 645, 갑옷 65, 투구 8, 총간 26개 등 수많은 환도와 적의 수급 8백여 급을 베었고, 이들의 왼쪽 귀 825개를 잘라 선조에게 전투결과를 보고했다.”

 

정문부는 길주성을 포위했는데, 함경도의 겨울을 맞이한 일본군은 얼어죽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고 뛰처나오기도 했다. 이때 원충서(?~?)라는 정문부의 부하 장수가 20여기의 기마병으로 2백명을 도륙해 버렸다. 그리고 단천군수 강찬(1557~1603)이 정문부에게 찾아와서 단천을 회복해 달라고 부탁한다. 정문부는 강찬의 300명 조선군에 기병을 포함시켜서 단천을 공격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으며, 단천에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얕잡아 보고 싸우러 나왔다(200). 이때 매복해 있던 정문부가 공격해서 쓸어버린다.

 

해가 바뀌어 1593년 1월에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고, 잘못하면 조명연합군과 정문부에게 협공당할 우려가 있어서 가토는 함경도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이때 가토는 길주에 있는 자신의 부하 가토 우마노조를 구하기 위해 3천의 병력을 보낸다. 정문부는 1,500 기명으로 매복해 있다가 길주로 향하는 가토의 지원병력을 공격해서 천여명을 죽였고, 나머지 일본군 병력은 길주성의 병력을 데리고 간신히 후퇴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2선발 가토는 22,800의 병력을 데리고 왔는데 함경도에 진출하기까지 별다른 병력의 손실이 없었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정문부 때문에 8천의 병력을 잃게 되었다. 함경도에서 가토가 물러난 것은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함경도의 겨울, 정문부의 공격이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문부의 공이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순신 옆에 원균이 있었다면, 정문부 옆에는 윤탁연(1538~1594)이 있었다.

 

의병장 정문부의 전공을 순찰사 윤탁연이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왜군 목을 가지고 함경남도를 지나면 모두 빼앗아 자기 수하 군사들에게 주었다. 윤탁연이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에게 옷과 월동 장비를 주었으므로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모두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정문부는 북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반정 이후에 정문부에 대한 기록이 보완되어 위의 내용이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게 되었으며, 숙종 때 1707년 길주에 북관대첩비가 건립이 되었다.

 

이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1904~1905) 때 일본의 이케다 마시스케(?~?)라는 소장이 북관대첩비를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야스쿠시 신사에 방치되어 보관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소앙(1887~1958)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일본의 재야사학자 최서면의 활동이 있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권 때 이해찬 국무총리가 북관대첩비를 돌려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일본은 북한과 외교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돌려주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남과 북이 의견을 일치해서 돌려달라면 주겠다는 성의없는 대답을 했다. 이때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북한의 넘버투인 김영남을 만나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2005년에 북관대첩비를 반환받았으며, 20063월에 북한의 길주로 보내주었다. 이로써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이후 백년만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문부는 이후 영흥 목사, 길주 목사의 벼슬을 지낸다. 아직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남쪽으로 보내서 싸워야 할 장수를 일본군의 씨가 마른 함경도에 썩히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정문부는 광해군 정권에서 남원부사를 역임하기도 했고,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한다. 인조반정(1623) 이후 이괄의 난(1624)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예전에 쓴 시 한수 때문에 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최선을 다해서 국가에 충성했던 정문부로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그는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관직에 진출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경상도 진주땅으로 이주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진주성 촉석루에는 농포 정문부 장군의 글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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