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본 고조선 강역과 한사군 위치는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중국 역사서를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의 강역도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상당히 오랜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1) 우선 우리 역사는 반도내에서 이루어졌다는 반도사관에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평양과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에 있던 작은 소국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이고, 해방 이후에 국사학계의 태두라고 하는 이병도 박사가 주장을 하면서 남한의 강단사학에서는 고조선이 평안남도에 있던 작은 소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반면 과거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공부를 했던 분들은 고조선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까지 뻗쳐있던 강력한 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남한의 강단사학과 독립운동가이면서 역사학을 같이 공부한 두 부분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의 강역이 넓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민족 감정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역사학은 그렇게 간단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은 과거에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밝히고 그 밝힌 것을 해석하는 학문이지 우리가 후대의 바램을 가지고 과거에 붙여서 사료를 왜곡하거나 할 수 있는 학문은 아닌 것이다.
고조선에 관한 문헌 사료 자체는 상당히 많지가 않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고고학 자료들이 보강되어야 한다. 고조선의 표지 유물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런 표지 유물들이 나오면 그것은 바로 고조선의 강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고조선의 표지 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비파형 동검’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역사학을 한번 비교해 보면, 북한도 초기에는 고조선의 강역이 평양 중심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주로 고고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해방 직후만 하더라도 일본인들이 고고학적 유물까지 조작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헌 사학자들은 전부 다 고조선은 고대 요동, 지금 하북성 일대까지 펼쳐져 있던 강역을 갖고 있던 제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문헌사학을 한 학자들은 다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사료에 고조선은 다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대 요동’은 어디인가? 지금에는 요하라는 강 동쪽을 요동으로 본다. 그런데 고대의 요동은 요녕성 동쪽이 아니라, 지금의 천진 북쪽에 개연이라는 곳과 옥전이라는 곳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사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조선이 무너진 자리에 세운 낙랑군은 옛 고조선이다. 그런데 요동에 있었다’라고 하는 중국의 기록들이 나오기 때문에 문헌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조선이 대륙에 있었다 주장을 해왔었다.
북한 내에서 고조선 가지고 고고학자들하고 문헌학자들이 논쟁을 하다가 리지린이라는 역사학자를 북경대 대학원에 유학을 보냈다. 리지린이라는 학자는 당시 북경대의 고힐강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를 지도교수로 삼아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고힐강은 1930~40년대 중국 학계를 휩쓸었던 고사변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리지린은 1961년에 고조선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 이것이 엄밀히 말해서 남북한 통틀어서 실제로 받은 최초의 한국학 박사학위라고 할 수 있다. 남한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씨가 받은 박사학위는 자기가 이전에 냈던 책을 자기가 제출하고 자기가 심사해서 받은 것이라 진정한 박사학위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당대 중국 최고의 학자인 고힐강이라는 학자를 지도교수로 삼아서 받은 고조선 연구가 남북한을 통틀어서 받은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지린은 당시 수많은 중국의 원전을 인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기가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에 2018년에 ‘고조선연구’라는 책으로 번역해서 출간하였다.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는 1961년도에 나온 박사학위논문으로 북한에서는 1962년도에 출간을 했다. 그 핵심 내용은 고조선이 평안남도에 걸쳐있던 작은 소국이 아니라 대륙까지 걸쳐있던 광대한 제국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BC 5세기에서 4세기 때까지의 고조선의 서쪽 영역은 지금의 난하까지였다가, 연나라 장수 진기에게 강역을 조금 뺏기고 난 다음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무렵에는 지금의 요녕성 대릉하까지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이다. 북한 학계는 1961년 이후에 고조선이 평양의 작은 소국이었다든지 낭락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든지 하는 학설이 전부 다 폐기되었고, 고조선은 대륙 고조선이고 낙랑군은 현재의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하고 하는 요동설로 정리가 되었다.
아쉬운 것은 남한 강단사학자들만 해방 이후에 친일 청산을 못하는 바람에 일본인 스승들이 말해준 대로, 가르쳐준 대로 고조선은 평안남도에 있던 소국이었고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아직까지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8월에 대한민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까지는 중국의 동북 3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을 비롯해서 지금의 하북성, 그 다음에 내몽골 지역에서 고조선의 표지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파형 동검’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내용은 1961년 리지린의 고조선연구에도 그런 내용들이 상당히 실려 있었다. 그동안 남한의 강단사학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중요한 숙주 중의 하나는 ‘분단’이라는 것인데 북한의 역사학을 소개하지 않던지, 소개하더라도 거꾸로 소개하는 그런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1980년대 말에 윤내현 교수가 고조선 연구를 펴냈을 때 그것이 바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를 본거다’ 라고 해서 국가안전기획부에 신고를 했고 윤내현 교수가 수사까지 받았던 것이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식민사학인 자기네 총독부 역사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을 다 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92년에 한중수교가 되고 중국 각지에서 고조선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니까 그제서야 말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해서 고조선 강역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요녕성 요하 부근까지는 올라갔던 것으로 학설을 조금씩 수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은 낙랑군,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사군이 평양 중심의 한반도 북부에 있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한사군이 중국의 요동 지역에 있든지 중국의 하북성 일대에 있는 것이 중국학자도 아니고 일본 학자도 아니고 남한 학자들이 왜 그렇게 뼈아프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한반도 북부를 고대 중국의 식민지로 만들지 않으면 아주 무슨 큰 일이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의 의식은 총독부 역사관이 무너지면 자기는 다 죽는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녕성 요하까지 갔다가 중심지가 평양에 와서 망했다는 ‘중심지 이동설’을 주장한다. 평양에서 망했기 때문에, 그 평양에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나머지 한사군도 그 주위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결론은 항상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을 중심으로 북한 지역은 다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이 결론을 도그마, 일종의 교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역사의 사맹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네가 주장하는 것만 주입시키는 바람에, 국민들 중에 역사에 특별히 관심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몰라서 그렇지 도저히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발생할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홍산 문화, 요하 문명의 중심지역인 우하량에 가보면, 거기에서 비파형 동검이 엄청 많이 쏟아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중국 답사를 가보면 출토되는 유물들이 그대로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에서는 급해지니까 ‘이것은 고조선 것이 아니라 산융이나 동호의 것이다’고 주장하는데,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그러한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에 따라서 고조선 것이 아니라 산융과 동호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일본인을 추종하더니 지금은 일본인 추종은 그대로 추종하고, 중국 동북공정까지 추종하면서 중국인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남한의 강단사학의 모습이다. 이들에게 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으니까 이 나라의 미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사료에 나온 대로 고조선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까지 걸쳐 있던 광대한 제국이면 제국을 다스리기가 고대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대한 지역 안에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후국, 제후국 할 때 후자를 따서 중국의 봉건제처럼 여러 후국을 거느렸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남한의 윤내현 교수 같은 경우에는 거수국 체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수’라는 말은 중국 후한서에 나오는 용어이다. 이렇게 거수국 또는 후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들이 부여, 고죽국, 고구려, 예, 맥, 기자국 등이었고 이들은 단군조선의 후국, 거수국이었다고 보는 것이 북한 학계와 남한의 민족사학계의 입장이다.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나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작은 나라가 아니었고 상당히 광대한 영역을 가진 나라였으며, 광대한 영역은 바로 북한에서는 후국, 남한의 민족사학에서는 거수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을 다스리던 나라가 고조선이었으며 고조선의 강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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