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은나라 사람 기자가 고려와 조선의 중화사대주의로 인해 단군을 이은 정통으로 보고 평양에 묘를 만들다
기자조선에 대해서
많은 조선의 유학자들은 단군과 기자는 정통으로 인정하고 위만은 찬혁자가 반란자라고 보았다. 이것은 조선의 중화 사대주의 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중국 은나라에서 왔다고 돼어 있기 때문에 중국 은나라에서 온 기자는 우리 정통으로 봐도 되겠다는 것도 일종의 중화 사대주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은나라의 시조가 설(契)인데,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이 세 여성과 함께 목욕하러 가다가 현조(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고 하는 ‘난생사화’로 전해진다. 이 난생사화는 동이족의 전통사화이다.
오늘날 은나라가 동이족 국가라고 하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민족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가 동이족이란 것은 모르고 중국에서 왔다라고 하니까 ‘중화 사대주의 사상’에서 기자는 단군을 이은 정통이라고 인정을 했던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 멸망할 때의 사람으로 서기 전 12세기경 사람이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을 사마천의 『사기』는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자는 은나라 주왕의 숙부(작은아버지)인데, 주왕에게 정치를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간쟁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이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기자를 석방시켜 주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무왕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동쪽 조선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사대전』이란 책을 보면 ‘그러나 신하는 아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자가 석방된 후 동쪽 조선으로 갔고, 무왕이 조선왕에 봉해 주었는데 신하는 아니었다. 이것이 상당히 모순되는 이야기이다]
핵심은 BC 12세기 때 사람인 기자가 석방되고 나서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조선은 단군조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를 남한의 교과서에서는 10세기 이전으로 소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사료들에 의해서 (남한의 주장이) 무너진다고 볼 수 있다.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왔는데, ‘동쪽 조선’이 어디냐 하는 문제에서 ‘평양으로 왔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고려 중후기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많아지면서 기자가 온 곳이 평양이라는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기자가 우리쪽 사료에 언제 등장하느냐면, 고려 숙종 7년에 처음 등장한다. 서기 1107년, 12세기 초에 예부(나라의 예의를 관장)에서 “우리나라가 교화된 것은 기자 덕분인데 아직 우리는 기자의 사당을 세워서 국가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자의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기자를 국가에서 제사로 모셔야 합니다.” 이렇게 고려 숙종에게 주청을 하였다. 그런데 기자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에 기자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고 가짜로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은 위화도 회군으로 성립된 나라인데, 위화도 회군의 논리 자체가 ‘작은 것이 큰 것을 거역하면 안된다’는 사대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이후 조선은 사대주의가 더욱 심해졌다. 고려 유학자들이 평양에 사당을 세워놓았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기자궁을 세웠고, 기자가 와서 ‘정전제라는 토지제도를 시험했다’고 주장했다. 정전제는 사각형 안에 우물 정(井)자를 써보면 네모가 아홉 개 나오는데 8개는 각 집안에 나눠서 농사를 짓고 가운데 부분은 같이 농사를 지어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제도이다. 그래서 기자가 정전제를 평양에 시범 보인 곳을 정해서 우물도 만들어 놓고 기자가 마셨던 우물이라고 했으며, 기자가 썼다는 지팡이를 가져다가 평양감사가 이임할 때 새로 오는 후임자에게 ‘이것이 기자가 썼던 지팡이입니다’ 라고 해서 주고 받은 의식까지 치뤘다고 한다. 기자로부터 2천 6~7백년이 지났을 때인데 죽은 나무가 전수된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들이 평양에 들렀을 때 평양 감사들이 기자의 무덤을 알려주었고 이것을 보고 간 사신들로 인해서 중국에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학계에서는 기자가 있던 곳을 하북성 노룡현이라고 보고 있다. 하북성 노룡현은 명ㆍ청 시대 영평부란 곳이었는데, 중국 기록에 보면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북성 노룡현이 기자가 있던 곳이고 그쪽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 라고 중국학계에서는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한 강단사학에서는 평양이 단군조선의 도읍이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고 거기에 낙랑군이 있었는 것인데, 평양 일대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기자 유적 외에는 기자고 위만이고, 기자조선의 유적이나 위만조선의 유적이 하나도 없다. 그냥 어거지로 일본인들이 조작해 놓은 것을 가지고 (남한 강단사학은) 아직까지도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북한에서 리지린을 단장으로 하는 중조학술조사단(중국과 조선 학술조사단)이 있었는데 그때 중국의 주은래 수상이 조사단 앞에서 ‘우리도 과거의 대국주의적인 역사 해석의 오류를 범했다. 기자가 평양에 있다는 둥 이런 잘못된 이야기들을 했다’라고 시인을 한 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1959년에 후대에 만들어진 기자묘를 다 철폐해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 주석을 보면 “두해가 말하기를 기자의 무덤은 양궁 몽현에 있다”라고 말했는데, 두해란 사람은 3세기 초반 사람이다. 그리고 ‘양궁 몽현’은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商丘市)이다. ‘상’(商)이 은나라에서 땄고, ‘구’라는 언덕 구(丘)자는 한자는 ‘옛 터전’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상구’라는 곳은 옛날 은나라 수도 자리 중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 상구가 옛날 몽현 자리인데, 실제로 지금도 그 양궁 몽현에 기자 무덤이 있다.
기자 조선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 중국학계는 기자가 하북성 노룡현에 있었고, 그곳이 기자 조선이 있었던 곳으로 보며, 그의 무덤은 훨씬 남쪽인 하남성 상구시 옛날 양궁 몽현에 있다고 보고 있다. 기자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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