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사 비하인드] 이성계의 의형제 여진족 이지란, 조선의 북방 만주 강역을 지키다
이지란과 그의 아들 이화영은 ‘여진족’(후에 만주족)이다.
이지란의 여진족 이름은 ‘쿠란투란티무르’이다. ‘란’자를 한자로 쓸때 난(蘭)자를 썼기 때문에 ‘이지란’이 된 것이다. 이지란은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었고, 왕성인 이씨를 하사받게 되면서 이씨로 개창하였다(청해 이씨). 청해는 지금의 북청인데, 원래 이지란의 본거지는 함경도 북청이 아니라 두만강 북쪽이었다.
이지란의 아버지는 ‘아라부카’로 두만강 북쪽의 천호(고려 후기 몽골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관직)라는 벼슬에 있던 인물이다. 이성계의 집안도 두만강 북쪽 연변 지역에서 원라나라의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다. 이성계는 동이족 내의 한민족이고, 이지란은 동이족 내의 여진족이라 서로 어울릴 수 있었다. 이지란이 이성계보다 네 살 정도 많았지만 이성계를 깍듯이 모시는 의형제를 맺었다. 이후 조선의 개창에 큰 공을 세우고 개국공신(44명) 중에 일등공신(16명)이 되었다. 당시 일등공신은 배극렴, 정도전, 조준 이런 인물들이다.
이지란의 첫 번째 부인은 함안군 부인 윤씨이고, 두 번째 부인은 이성계가 개경에 와서 혼인을 했던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곡산 강씨)이다.
당시에는 몽골족, 여진족과 같은 동이족이라고 어울려 살았는데, 이성계가 살았던 만주 지역의 ‘달단동’이라는 마을의 ‘달단’은 몽고(蒙古) 또는 몽고족을 달리 이르는 말이었으며 몽고족, 여진족, 한민족이 뒤섞여 살았다. 이지란은 위화도 회군(1388년) 때부터 이성계와 같이 다니며 공을 세웠다.
이지란과 그의 아들 이화영은 두만강 북쪽의 땅 문제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 영조, 정조 무렵에 문경공 황경원(조선 후기 홍문관제학, 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라는 사람이 ‘청해백 이지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신도비는 정2품 이상 벼슬을 하면 세울 수 있는 비석이다. 황경원은 두만강 북쪽 땅이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방을 다스릴 때에 여진을 내 백성으로 만들려고 잘 타이르니,
여진족이 모두 국민이 되기를 원해서
의무적으로 부역도 하고 조세를 바치고,
그 후 감히 반하는 자가 없었다.
수 백년 동안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다니던 풍속이 모두 의관지족으로 호해서,
백두산에서부터 훈춘강까지 천 여리의 여진 땅이,
우리나라 영토가 된 것은 실로 공(이지란)의 공이었다.”
그리고 조선 고종 때 이범윤이 간도관리사, 간도시찰사가 되어 압록강 북쪽과 두만강 북쪽의 땅을 조선 강역으로 편입시켰는데, 『북여요선』(北輿要選)이라는 책에서 ‘백두구강고’(白頭舊疆攷, 백두산의 옛 강역에 관한 고찰)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서 이범윤은 공험진 선춘령을 언급하면서 고려 예종 때 윤관 장군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까지 가서 고려의 땅이라고 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선춘령은 회령의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
윤관이 영토를 확장할 적에 여기에 이르러 공험진을 축성하고
선춘령 위에 비석을 세워 ‘고려의 경계’(高麗之境)라고 새겼다.
비석의 네 면에 글이 있었는데 모두 호인들이 깎아 버렸다”
- 백두구강고 중
이범윤이 간도관리사로 파견된 이유는 당시에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서 농사를 지었는데 청나라에서 그곳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하고 조선의 강역을 살펴보게 된 것이다. 숙종 때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는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토문강은 오늘날 송화강의 지류 중 오도백하다.
“고려의 선춘령이 그 안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토문강(土門江) 또한 그 안에 있다.
대저 토문강 하류는 송화강(松花江)에 접해 있고,
지금의 백도눌성은 바로 송화강 이북의 땅이니
성 남쪽의 산천이 멀지 않으므로 고려의 경계가
본디 우리 대한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고적에 의거하여 요점을 간추려 놓고 훗날의 넓은 고찰을 기다린다.”
- 백두구강고 中
이지란이 아들 이화영은 바로 압록강 북쪽, 두만강 북쪽 땅의 소유권이 어디인가를 말해주는 인물이다.
조선 태종이 재위 4년에 김첨이라는 인물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그 목적은 명나라와 조선의 북방강역에 대해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이 들어서기 전, 1388년에 명나라에서 지금의 심양 남쪽에다가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하니까 고려의 우왕과 최영 장군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우왕은 박이중이라는 인물을 사신으로 보내서 명나라에 항의하였고, 한편으로는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요동정벌군을 꾸리게 하였다. 이에 명나라 주원장이 급해져서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심양 남쪽 지금의 진상 둔진이라는 곳에 설치했던 철령성을 철령시 은주구라는 곳으로 이전하였다. 이로써 심양 남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칠백리 공험진까지가 고려 강역임이 재확인 되었고 이것은 고려를 계승한 조선의 강역이 되었다.
조선 태종은 다시 한번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강역을 명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기에 김첨이라는 예문관 제학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이 땅의 유래를 적어서 보냈다.
조사해 보건데,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ㆍ길주ㆍ단주ㆍ영주ㆍ웅주ㆍ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공험진 이남이 또 고황제의 ‘왕국유사’라는 명령을 입었사오니,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 유종의 인민들을 본국에서
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시면 한 나라가 다행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배신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주본과 지형 도본을 받들고 경사에 가게 하여 주달합니다.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5월 19일 己未 4번째 기사 중
당시에 압록강 북쪽과 두만강 북쪽은 우리 민족보다 여진족이 더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명나라가 여진족을 자신의 민족이라고 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태종은 압록강 두만강을 열 개 처로 나눠가지고 만호라는 벼슬도 주고 천호라는 벼슬도 주었다. 그리고 매년 연초가 되면 여진족 중에 조선의 벼슬을 받은 사람들이 와서 하례하고 선물을 받아갔다. 이때 십처(十處)에 여진족 두목들은 조선의 벼슬을 받지만 상당 부분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다스리게 되었다. 바로 그 중의 한 명이 이역리불화라는 인물인데, 그가 바로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이다.
김첨은 명나라의 국서를 받아서 귀국하였다.
계품사 김첨이 준청한 칙서를 가지고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
칙서는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에게 칙유한다.
상주하여 말한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을 성찰하고 준청한다. 그러므로 칙유하는 것이다.”
임금이 김첨에게 전지 15결을 하사하였다.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0월 1일 기사 2번째 기사 중
고려의 북방 경계는 ‘동계’라고 하는데 고려사 지리지 동계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살펴보면, 철령 이북은 삭방도가 되고, 이남은 강릉도가 된다.
고려 때에 혹 삭방도, 혹 강릉도, 혹 합쳐서 삭방강릉도,
혹 강릉삭방도, 또는 연해명주도라 불렀다.
한 번 나누고 한 번 합침에 따라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 이남에서 삼척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
- 고려사 지리지 동계 중
오늘날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는 공험진을 함경도로 그려놓고, 강원도 삼척을 포항 근처로 그려놓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중국의 기록 <원사>나 <명사>는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읽기 어렵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으로 쉽게 검색이 가능하다. '김첨'이라는 인물을 검색하면 당시 태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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