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7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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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170

[근대19] 동학2 - 백성 잡자고 외국 군대 끌어들이는 왕과 왕비 [근대19] 동학2 - 백성 잡자고 외국 군대 끌어들이는 왕과 왕비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조선역사상 가장 큰 민란이라는 것이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전주 이씨)가 있는 곳을 점령당한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 고종이 먼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자는 제안을 하였고, 당시 관료들이 반대를 하였다. (민씨척족정권의 관료들조차 반대하였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다면 텐진조약(1885)에 입각해서 일본 군대도 조선땅에 들어오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조선 땅이 양국의 전쟁터가 될 것이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종과 민비는 당연히 청나라가 이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과는 달리 국력이 성장한 일본은 청나라와 한판 뜨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기 .. 2021. 6. 30.
[근대18] 동학1 - 남도퍼레이드(황토현&황룡촌 전투) [근대18] 동학1 - 남도퍼레이드(황토현&황룡촌 전투) 아프고 슬픈 역사이지만 자랑스러운 역사 ‘동학농민운동’ 1894년 1월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저항하여 고부민란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용태(1854~1922)를 파견해서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는데, 이용태는 조병갑 편을 들면서 전봉준을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하였다. 이에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이 3월에 백산에서 모였는데 이때 8천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이었으며 주동자가 누군지 모르게 하기위해서 ‘사발통문’을 이용하였다. [전봉준의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대 두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 2021. 6. 30.
[근대17] 큰 손 명성황후? 배고픈 전봉준? [근대17] 큰 손 명성황후? 배고픈 전봉준? 동학농민운동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하는데 1894년에 일어났다. 1863~1873년 : 대원군 집권기 1866년 - 병인박해, 병인양요 1871년 - 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조선은 1980년대 초반 개화정책 추진한다. 이때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정책을 총괄한다.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고 별기군을 창설한다. 일본에 수신사, 조사시찰단 파견하고 청에 영선사 파견하면서 나름 개화정책을 진행하게 된다. 1882년 구식군대의 불만으로 인한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청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게 된다. 갑신정변은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었으며 입헌군주제 주장하였다. 한편 ‘동학’은 1.. 2021. 6. 29.
[근대16]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한반도 중립화론 [근대16]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한반도 중립화론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남아있던 홍영식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개화’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인 1884년 5월, 러시아가 조선과 수교를 맺었다. 러시아의 팽창은 당시 세계가 두려워하는 수준이었다. 베이징조약(1860)으로 연해주를 청에게서 할양받은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을 지배하다)라는 항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곳은 겨울에는 얼어버리는 항구라서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을 갖기를 원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청의 황쭌센이 『조선책략』을 썼고, 이후에 조선은 미국과 수교를 맺기도 했다(.. 2021. 6. 25.
[근대15] 갑신정변, 그러나 삼일천하...평가 [근대15] 갑신정변, 그러나 삼일천하...평가 임오군란으로 청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서 개화파도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청의 내정간섭을 받아들인 온건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중체서용)을 본받아 ‘동도서기론’을 전개하려고 하였고,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처럼 나라 전반의 개혁을 하자는 주장을 했다. 온건개화파(수구당ㆍ사대당) : 김홍집, 김윤식, 민영익 급진개퐈파(개화당ㆍ독립당) :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일행은 일본군을 끌어들여 청을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준비한다. 이것이 갑신정변(1884)으로 우정국개국축하연 때 거사를 진행하였다. 김옥균과 박영효 일행은 우정국 거사 후에 창덕궁으로 들어가서 고종과 민비를 만나고 그들을 경.. 2021. 6. 25.
[근대14] 젊은 친구들은 왜 개혁을 꿈꿨나? [근대14] 젊은 친구들은 왜 개혁을 꿈꿨나? 대원군 집권이 끝나고 민씨척족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강화도조약(1876)이 체결되었고, 1880년대에 개화정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부정부패, 민씨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1) 개화정책이 중단되었고, 2)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으며, 3) 민비는 장호원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압송하면서 민비는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당연히 청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재정고문 마젠창,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군사고문 위안스카이). 임오군란으로 인해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주둔(1882년 제물포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개화론자들은 박규수(1807.. 2021. 6. 22.
[근대13] 민비 비판에 대한 올바른 자세 [근대13] 민비 비판에 대한 올바른 자세 민비는 당시 조선의 국익을 위해서, 조선의 백성을 위해서는 1도 노력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 민씨 일가를 위해서만 노력한 인물이기에 비판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만약 조선이 일본이 아닌 청이나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민비는 이완용 버금가는 욕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민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 비판받아 마땅한 인물이었어도 일본에 의해 죽은 것까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민비가 아무리 역사적 비판을 받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민비를 일본이 죽인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그때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현해탄을 건너서 일본 천황의 부인을 죽여야겠다는 시도가 일어나는.. 2021. 6. 22.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1880년대 초반 개화 정책으로 의정부와 6조 사이에 개화를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었다. 그리고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여 구식군대로 개편하고, 신식군대로 별기군을 창설한다. 조사시찰단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영선사를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에는 국고가 탄탄했다. 그런데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민비는 모자란(자폐증세가 있는) 순종의 건강을 위해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살을 투하하고, 고종은 매일 잔치를 벌이며 흥청망청 국고를 탕진하기 시작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하루에 왕과 왕비가 쓰는 돈이 천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이 10년간 비축한 재산을 고종과 민비가 1년만에 탕진한 .. 2021. 6. 20.
[근대11] 정한론과 개항 [근대11] 정한론과 개항 대원군 집권기(1863~1873)는 최익현의 상소로 끝나고 이후 민씨척족정권이 시작된다.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이었는데, 당시에 박규수 같은 인물은 ‘초기통상개화론자’였지만 대원군이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민씨척족정권이 들어서면서 개화론자들이 문호를 개방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1876년에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1854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의 함포외교로 개항을 하게 되었고,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의 시기에 집권했던 대원군은 조선의 근대화에 발목을 잡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쇼군이 정치를 주도하고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였.. 2021. 6. 20.
[근대10] 대원군 VS 민비(며느리 잘못들인 시아버지의 비극) [근대10] 대원군 VS 민비(며느리 잘못들인 시아버지의 비극) 흥선대원군이 1863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1873년까지 10년간 집권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 왕권강화(안동 김씨 축출, 과거제 부활, 비변사 폐지, 경북궁 중건, 『대전회통』, 『육전조례』 편찬)를 꾀하였으며, 민생 안정을 위해 삼정의 문란을 개혁(양전사업, 호포법, 사창제)하려고 하였고, 서원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에 1866년에 병인박해,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1868년에 오페르트 토굴 미수 사건이 일어났으며,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나기도 했다. 1863년에 12시에 왕위에 오른 고종은 15세에 중전을 맞아들이게 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은 .. 202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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