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8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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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170

[근대9] 누가 누구를 더럽다 해? (Feat. 대본의 진실) [근대9] 누가 누구를 더럽다 해? (Feat. 대본의 진실) 대본 없이 원테이크로 진행하는 영상이라는 점을 양해(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지난 영상에서 언급한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미개함과 열악함, 불결함에 대해 추가로 보충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교훈이 현재의 나에게 반영해 보고, 미래를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과거의 상황을 지금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당시의 상황과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조선의 후진성과 미개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게 병합되는 것이 마땅했다고 하면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아가서 .. 2021. 6. 20.
[근대8] 19세기 열악함, 그래서? (20분 순삭ver.) [근대8] 19세기 열악함, 그래서? (20분 순삭ver.) 병인박해(1866.1)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7) 병인양요(1866.9)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1868) 양요(洋擾)라 함은 서양인의 소요라고 할 수 있다. 서양(洋), 소요(擾)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은 1871년에 왜 쳐들어왔을까? 핑계는 1866년에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소각 사건이었다( 1866년 당시에 평양감사 박규수와 평양 관민들에 의해 제너럴셔먼호가 불태워졌다). 이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에서 여러 가지 이권을 빼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프랑스는 1866년에 병인양요를 일으키며 쳐들어왔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을 처음으로 개항시킨 국가였다. 당시에 페리 제독(1794~18.. 2021. 6. 20.
[근대7]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한 진짜 이유(Feat.풍수지리) [근대7]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한 진짜 이유(Feat.풍수지리) 1866년 1월 - 병인박해 1866년 7월 -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 10월 - 병인양요 1868년 -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1788~1836)의 묘를 이장시켰다. 이하응은 당시 유명한 풍수지리가 지관(박재상)에게 명당을 추천해 달라고 하였는데, 지관이 두 개의 명당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하나는 자손이 대대로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될 명당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명당이었다. 이하응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묘자리를 선택했고, 그곳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시켰다. 풍수지리사상은 신라 말기 도선(827~898)이라는 승려가 도입하였는데, 신라가 .. 2021. 6. 20.
[근대6]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백두혈통? [근대6]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백두혈통?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이었다. 이때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로 인해서 병인박해(1866.1)가 일어났고, 이 병인박해로 인해서 병인양요(1866.10)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사이에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7)이 있었다 셔먼 장군(1820~1891)은 미국의 남북전쟁 때 영웅이다. 이 셔먼 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배가 제너럴셔먼호였는데 이 배는 미국의 상선이었다(미국인 3명, 영국인 2명, 중국인 16명, 말레이시아인 3명으로 구성됨).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평양에 와서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때 평양 감사는 박규수(1807~1877)였는데, 대표적인 개화론자로 연암 박지원(1737~1805.. 2021. 6. 3.
[근대5] 병인양요와 KTX [근대5] 병인양요와 KTX 1866년 1월 우리 역사상 최대의 박해인 ‘병인박해’가 일어나서 조선인 신도 8천명이 죽고 프랑스 신부 12명 중에 9명이 죽게 된다. 이때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건너가고, 청나라 텐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가 조선을 침략해 온다. 이것이 병인양요(1866.9~10)이다. (병인양요가 있기 두 달전인 1866년 7월에는 제너럴셔면호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프랑스 함대는 강화해협을 지나 양화진까지 들어왔다. 이때 병인박해로 죽은 조선인 신도의 가족들이 프랑스 함대의 길안내를 했다고 한다. (후에 김수환 추기경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종교 문제 때문에 국가와 민족에게 반하는 행위를 했음’을 천주교 수장으로 사과했다) 정탐을 끝낸 프랑스 함대가 .. 2021. 6. 3.
[병자호란10] 김준룡의 광교산전투 승리. 누르하치의 사위를 죽이다 [병자호란10] 김준룡의 광교산전투 승리. 누르하치의 사위를 죽이다 우리 역사의 최대 패전으로 알려진 쌍령전투는 비록 막상 무지막지하게 패전한 전투는 아니었다. 이번 강의 영상은 병자호란 때 비록 후퇴했지만 적장을 죽인 것으로 알려진 김준룡(1586~1642)의 광교산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각 도에서 근왕병이 출동한다. 도원수 김자점은 이완과 함께 동선령 전투(12월 13일)에서 패하고 패잔병을 모아서 양평에 주둔한다. 그리고 강원도의 근왕군은 검단산 전투(12월 27일)에서 패배한다. 정세규(1583~1661)를 필두로한 8천의 충청도의 근왕군은 1월 2일에 험천(오늘날의 탄천)에서 청나라에게 거의 전멸당한다. 큰 승리는 아니지만 나름대.. 2021. 6. 3.
[병자호란9] 전설적 패전이라는 쌍령전투? 반전이 있는가? [병자호란9] 전설적 패전이라는 쌍령전투? 반전이 있는가? 청태종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했던 그해 1636년 12월 압록강이 얼었을 때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것이 병자호란(1636)이고, 8일 만에 한양을 점령당하는 기록을 세운다. 원래 북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당연히 강화도로 튀어야 하는데, 강화도로 도망갈 길을 청태종 홍타이지가 300명의 별동대를 보내서 막아버렸기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당시에 시체가 빠져나간다는 광희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항전을 했다. 남한산성의 47일간의 항전이라고 했는데 음력으로 계산하면 12월 31일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46일간의 항전이 맞을 것 같다.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은 비참했다. 인조도 쌀이 없어서 굶기 시작했기 때.. 2021. 5. 31.
[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흥선대원군 이전의 대원군들을 죽고 난 다음에 대원군 칭호를 받은 것이고, 흥선대원군은 살아있을 때 그 칭호를 받았다. 이전의 대원군들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10년간 집권(1863~1873)한다. 그 기간의 중간 즈음에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을 단행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쇄국정책)을 펼쳤다. 이것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에 발목을 잡았다는 역사적 비판을 오늘날까지도 받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인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에서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부대에 개박살난다. 이때 러시아가 중재.. 2021. 5. 31.
[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흥선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리고 왕이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개혁작업을 시작한다. 1. 왕권 강화 대부분 왕조 시대에 왕권을 강화하는 왕은 전성기를 누리며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통일신라의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혁파하면서 진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고려의 광종은 호족과 개국공신 세력을 제거하면서 왕조를 안정화시켰다. 고려의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빼앗고, 권문세족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하면서 개혁작업을 하였다. 조선의 태종은 개국공신과 외척을 제거하고 사병을 빼앗으면서 왕권을 강화하여 이후 세종의 태평성.. 2021. 5. 31.
[근대2] 세도정치기와 흥선대원군의 등장 [근대2] 세도정치기와 흥선대원군의 등장 조선의 19세기룰 세도정치기라고 한다. 정조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순조(재위 1800~1834)가 11살에 왕이 되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1809~1830)는 나름 똑똑했다고 하지만 비명에 죽고, 효명세자의 아들이 8살에 즉위하여 헌종(재위 1834~1849)이 되었다. 헌종 역시 23살에 갑자기 죽게 되었고, 강화도령 철종(재위 1849~1863)이 19세에 왕이 되었다가 33살에 죽게 된다. 이러한 순조, 헌종, 철종 3대 60여년간을 세도정치기라고 이야기한다. 이 시기는 왕권이 완전히 실추되었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가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17세기가 나름 붕당정치가 활성화된 시기라고 본다면, 18세기는 노론의 1당 독재 시기였고, 19세기는 노론.. 202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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