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0] 김준룡의 광교산전투 승리. 누르하치의 사위를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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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병자호란10] 김준룡의 광교산전투 승리. 누르하치의 사위를 죽이다

by [수호천사]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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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10] 김준룡의 광교산전투 승리. 누르하치의 사위를 죽이다

 

 

우리 역사의 최대 패전으로 알려진 쌍령전투는 비록 막상 무지막지하게 패전한 전투는 아니었다. 이번 강의 영상은 병자호란 때 비록 후퇴했지만 적장을 죽인 것으로 알려진 김준룡(1586~1642)의 광교산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각 도에서 근왕병이 출동한다. 도원수 김자점은 이완과 함께 동선령 전투(1213)에서 패하고 패잔병을 모아서 양평에 주둔한다. 그리고 강원도의 근왕군은 검단산 전투(1227)에서 패배한다. 정세규(1583~1661)를 필두로한 8천의 충청도의 근왕군은 12일에 험천(오늘날의 탄천)에서 청나라에게 거의 전멸당한다.

 

큰 승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조선의 근왕군 중에서 전라도 근왕군은 15일 광교산에서 적장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고, 평안도 근왕군은 128일에 김화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있었고, 홍타이지는 남한산성 옆에 있는 오늘날의 위례신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판교 지역에 홍타이지의 친동생이고 도르곤(1612~1650)의 동생인 도도(1614~1649)라는 인물이 주둔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분당에는 양구리(1572~1637)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양구리는 14세 때부터 누르하치와 전장을 누빈 백전노장이었고 누르하치의 사위가 된 인물이었다. (홍타이지의 매형)

 

전라도 근왕군은 8천명 정도였는데, 화엄사의 각성(1575~1660)이라는 스님이 승병 2천을 거느리고 합류한 상황이었다. 당시 이시방(전라도 관찰사, 1594~1660)8천의 병사를 몰고 올라왔는데, 먼저 김준룡에게 2천의 병력을 주어서, 김준룡은 광교산에 진을 쳤다.

 

 

이때 판교 근처에 도도가 1,500명으로 주둔하고 있었고, 험천에서 충청도 근왕군을 물리친 양구리가 1,500명을 거드리고 진을 치고 있었다. 김준룡은 맨 앞에 포수(조총부대), 그 뒤에 사수(활부대), 그리고 그 뒤에 살수(창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먼저 도도가 기병으로 양쪽을 공격했으나 조총부대에 의해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그 뒤에 도도는 기병과 보병으로 공격하였고 김준룡은 포수와 살수가 무너지고 광교산 정상으로 물러났다.

 

이때 도도는 광교산 정상을 공격하기 위해 양구리를 불렀다. 양구리는 우회하여 광교산 뒤쪽으로 접근했다. 이때 매복해 있던 조총부대에 의해 총을 맞고 사망했다고 한다. (혹은 양구리가 다른 정상에 올랐을 때 김준룡이 양구리가 차지한 정상을 탈환하기 위해 시도하다가 죽였다는 기록과 대포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준룡은 적장을 죽였지만 총과 화약이 떨어져서 일단 부대를 후퇴하여 수원근처로 내려온다. 이때 도도가 광교산에서 죽은 양구리의 시신을 수습해서 홍타이지에게 가져갔다. 양구리의 죽음을 슬퍼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홍타이지... 홍타이지는 죽은 양구리의 시신을 자신의 황제옷으로 덮어주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적장을 죽이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지만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의 서열 15위 정도의 적장을 죽이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시방은 남은 6천의 병력으로 수원의 김준룡과 합세해서 치고 올라갔으면 좋았겠지만, 김준룡이 패배한 것으로 알고 병력을 충청도로 후퇴시키고 금강의 다리를 파괴시켜 버린다.

 

광교산 전투는 판교의 도도와 분당의 양구리가 수지의 김준룡과 치른 전투다... (지역 이름만 놓고 보면 부동산 전투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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