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9] 전설적 패전이라는 쌍령전투? 반전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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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병자호란9] 전설적 패전이라는 쌍령전투? 반전이 있는가?

by [수호천사]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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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9] 전설적 패전이라는 쌍령전투? 반전이 있는가?

 

 

청태종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했던 그해 163612월 압록강이 얼었을 때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것이 병자호란(1636)이고, 8일 만에 한양을 점령당하는 기록을 세운다. 원래 북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당연히 강화도로 튀어야 하는데, 강화도로 도망갈 길을 청태종 홍타이지가 300명의 별동대를 보내서 막아버렸기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당시에 시체가 빠져나간다는 광희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항전을 했다. 남한산성의 47일간의 항전이라고 했는데 음력으로 계산하면 1231일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46일간의 항전이 맞을 것 같다.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은 비참했다. 인조도 쌀이 없어서 굶기 시작했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닭들을 잡아다가 인조에게 바쳤다고 한다. (오늘날 남한산성에 백숙이 유명하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왕이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각지의 근왕병(勤王兵 : 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군인)들이 왕을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병자호란 때의 ‘쌍령전투’300의 청나라 기병에게 4만의 조선군이 패배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고 하지만 솔직히 이것보다 더 황당한 패배를 기록한 전투 후보들도 있다.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 개마무사 15만명이 털려버린 주필산 전투(645)가 최악의 패비일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는 금나라의 사묘아리(?~?)에게 6~7만이 털려버린 갈라수 전투(1109)도 있다. 조선시대로 넘어와서 임진왜란 당시에 와키자카에게 털려버린 용인전투가 있고, 원균이 말아먹은 칠천량 해전도 당당한(?) 최악의 패배 후보에 속한다. 조선시대만 놓고 본다면, 3대 패전으로 용인전투, 칠천량해전, 쌍령전투를 손꼽기도 한다. 그 밖에 한국전쟁 때 유재흥(1921~2011)이 이끄는 부대의 현리전투(1951)는 용인전투와 쌍령전투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말도 안되는 패전도 있다.

 

왕을 구하기 위한 근왕병 중에 경상도의 근왕병이 가장 먼저 남한산성 근처까지 온다. 4만의 병력이라고 하지만 8천 혹은 2만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조선 후기의 지방군은 속오군(束伍軍) 체제였다. 임진왜란 때에 제승방략(制勝方略, 전쟁 초기에 적보다 우세한 변력을 집중 운영하여 적을 제압하는 전략) 체제가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면서 무너졌으며,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었는데 각 도에 병영을 설치하여 그 지역의 지방관이 지휘하는 체제이다. 진관체제는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는 약점이 있다.

 

진관체제는 속오법(束伍法)으로 운영되었는데,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다가 한가한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하는 시스템이었고 양반부터 노비까지 군역의 의무를 지게 했다. 솔직히 조선 후기의 군인들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농민군이었다고 보면 된다. 당시에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으며 1년에 2~3개월 군사훈련을 했다고 한다.

 

지금 경기도 광주에 쌍령 지역이 있다. 이곳에 경상도의 근왕군을 거느리고 올라온 사람은 심연(1587~1646)이라는 관찰사였다. 심연은 좌도병마사 허완(1569~1637)우도병마사 민영(?~1637)에게 각기 4천의 병력을 주고 진을 치도록 하였다. 청나라는 누르하치의 둘째아들이었던 다이샨의 큰 아들인 아이신교로 요토(1599~1638)가 아마도 6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악다귀와 실투가 진을 치고 있었다.

 

 

먼저 악다귀가 허완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당시 속오군은 조총부대였는데 총 10발을 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총알이 빨리 떨어져버렸다. 연려실기술(1776)에 의하면 허완이 전투에 나가기 전부터 두려움에 떨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허완을 큰 장군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하간 허완과 민영은 문관이었고, 후방에 있던 심연이 자신의 부하 도경유(1596~1636)를 보내 이들에게 명령하였다. 허완이 청나라 기병을 상대하려고 할 때, 무인 출신의 박충겸(?~1636)이 적이 가까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도경유가 사격하라고 재촉하면서 박충겸의 목을 베어버렸다.

 

허완의 진영을 쳐부순 악다귀의 부대가 민영의 진으로 쳐들어왔을 때, 나름 민영은 진영을 잘 꾸리고 있었으나 민영의 진영에 있었던 박충겸의 아들이 화약고에 불을 질러서 자폭하였고 이후 총알을 지급받지 못한 민영의 부대가 속수무책으로 청나라의 기병에게 당했다고 한다.

 

심연의 32천은 조령 밑으로 후퇴하였고, 이날의 쌍령 전투에서 26백명 정도가 전사했다고 한다. 너무 어이없는 패전이라 쪽팔린 패전이지만 나라의 운명을 바꿀 대회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청나라의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장수인 악다귀가 부상을 입었고, 실투는 죽어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최대의 승리라면 청나라에서 엄청 나게 선전을 했을텐데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쌍령전투의 패배는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지방군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였다. 물론 이 쌍령 전투 말고 어처구니 없는 전투는 험천 전투(2000여명 전사), 검단산 전투(1000여 명 전사), 안변 전투(3~4000여 명 전사) 등이 있다. 당시에 근왕병이라고 모였지만 청나라 기병에 대한 공포감에 쫄아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쌍령 전투의 패배가 부풀려진 듯한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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