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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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by [수호천사]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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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흥선대원군 이전의 대원군들을 죽고 난 다음에 대원군 칭호를 받은 것이고, 흥선대원군은 살아있을 때 그 칭호를 받았다. 이전의 대원군들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10년간 집권(1863~1873)한다. 그 기간의 중간 즈음에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을 단행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쇄국정책)을 펼쳤다. 이것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에 발목을 잡았다는 역사적 비판을 오늘날까지도 받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인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에서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부대에 개박살난다. 이때 러시아가 중재를 해서 베이징조약(1860)이 체결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많은 이권을 챙기게 되었는데, 러시아 역시 이때 연해주를 할양받게 되었고,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러시아어 스파시바’ - 감사합니다

 

두만강 근처 국경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출몰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상당히 스트레스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조선에는 천주교 교세가 상당하였다. 대원군의 집안도 천주교 집안이었다. 고종의 유모가 천주교인이었고, 유모를 통해 대원군의 부인과 딸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때 천주교도 관리 중 하나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이자고 하면서 천주교 신자들과 친하게 지내자고 제안을 하였다. 대원군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프랑스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유생들의 지지를 받아야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묘지림을 벌목하는 등 유생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었던 시점에서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야 할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성리학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생각하던 유생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서학인 천주교를 경계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유생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천주교를 탄압하기로 한다. 사실 사람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더 무서워지는 경향이 있다. (사회주의 경력이 있는 박정희가 반공의 투사가 된 것처럼) 대원군은 천주쟁이를 다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때 8천명 정도의 조선인 신도들을 죽였다고 한다(병인박해). 당시 잡혀온 사람들은 남자가 많았는데, 여성 순교자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짓눌려 살았음을 알 수 있으며, 천주교의 평등 사상을 받아들이고 순교한 것이다)

 

천주교인들을 박해한 절두산

 

당시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에 9명이 잡혀저 죽음을 당했다. 이대 리델 신부를 비롯한 3명의 프랑스 신부가 살아서 중국으로 도망쳤다. (리델 신부는 여장을 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당시 텐진에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극동함대 사령관은 로즈 제독(1812-1882)이었다.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혼내주러 출동한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186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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