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7]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한 진짜 이유(Feat.풍수지리)
- 1866년 1월 - 병인박해
- 1866년 7월 - 제너럴셔먼호 사건
- 1866년 10월 - 병인양요
- 1868년 -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1788~1836)의 묘를 이장시켰다. 이하응은 당시 유명한 풍수지리가 지관(박재상)에게 명당을 추천해 달라고 하였는데, 지관이 두 개의 명당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하나는 자손이 대대로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될 명당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명당이었다.
이하응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묘자리를 선택했고, 그곳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시켰다.
풍수지리사상은 신라 말기 도선(827~898)이라는 승려가 도입하였는데, 신라가 멸망하는 데 풍수지리 사상이 역할을 하였다. 당시 신라 수도 경주는 왕의 기운이 다했다는 소리를 듣고 지방 호족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풍수지리사상은 서경길지설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1135년)에 영향을 주었고, 고려 문종 때부터 남경길지설이 대두되면서 후에 조선의 수도가 한양이 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풍수 사상이 묘자리 선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산송문제’(묘자리 때문에 생기는 소송 문제)가 자주 생겼다.
흥선 이하응은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10자 깊이(3미터)로 땅을 파서 관을 안치하였으며, 관 위에 석회와 쇳물을 부어넣었다고 한다. 이후에 고종이 1897년에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황제가 되었고 순종 역시 황제가 되었다. (실제로 남연군의 묘는 세종의 능인 영릉과 함께 좋은 자리라고 생각된다) 남연군의 묘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고 주변에 세도가들의 무덤이 많이 생겼다. (황제가 나와서 좋기는 하겠지만 어떤 황제인지를 고민했어야 한다. 조선을 말아먹는 황제가 되었으니...)
오페르트(1832~1903)라는 사람은 독일인 인류학자로 나름 동양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도굴 사건 이후에 『금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쓴 인물이다.
그는 병인박해 이후에 대원군에게 복수하려는 생각도 있었는데, 오페르트를 자극했던 인물은 병인박해 때 12명 중 9명이 죽고 생존한 세 명 중 한 명의 신부인 페롱(1827~1903)이라는 신부였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 상인 젠킨스가 인력과 장비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140여 명의 인력과 2대의 함대를 거느리고 충남 덕산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구)의 묘로 향했다. 이들은 도굴을 하는 데 너무나 당당하게 대낮에 덕산군청을 공격하고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미리 방비를 잘 해 둔 덕분에 그들은 도굴하는 데 실패하고 돌아가면서 영종도(지금의 인천공항)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때 오페르트의 일당 2명이 죽었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들 2명의 목을 효수하여 9도에 효시하였다)
오페르트의 행위는 반인륜적 행위로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서양인들은 기본적으로 도둑놈, 절도범 같은 놈들이라고 인식되었으며,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편 흥선대원군에게 대의명분을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우리가 개화로 가는 기목에 마이너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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