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8] 19세기 열악함, 그래서? (20분 순삭ver.)
- 병인박해(1866.1)
-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7)
- 병인양요(1866.9)
-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1868)
양요(洋擾)라 함은 서양인의 소요라고 할 수 있다. 서양(洋), 소요(擾)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은 1871년에 왜 쳐들어왔을까? 핑계는 1866년에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소각 사건이었다( 1866년 당시에 평양감사 박규수와 평양 관민들에 의해 제너럴셔먼호가 불태워졌다).
이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에서 여러 가지 이권을 빼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프랑스는 1866년에 병인양요를 일으키며 쳐들어왔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을 처음으로 개항시킨 국가였다. 당시에 페리 제독(1794~1858)의 함포 외교(1854)로 ‘전쟁이냐 통상이냐’를 놓고 일본은 통상을 선택하였다(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강자에게 납작 엎드리는 습성이 있다). 당시에 미국의 존 로저스 제독(1812~1882)이 함대를 일본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당시 미국이 인지하고 있는 조선은 어떠했을까? 조선에 대한 소문은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가 물러갔다는 객관적 사실로 인해서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구한말 조선인의 평균 신장이 163cm이었기 때문에(일본은 150cm 정도였음) 일본인들에 의해서 조선인들이 힘이 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상륙 훈련까지 하고 조선으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의 전투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강화도의 초지진과 덕진진을 무너뜨린 미국은 광성보에서 치열한 전투(라고 하기 보다는 학살의 수준)가 벌인다. 조선인의 전사는 350명이고 미국인의 전사는 3명이었다. 무기의 차이도 있었고, 당시 총알을 막기 위해서 삼베옷을 13겹으로 해서 입었지만, 가난한 농민들은 솜에 물을 적셔서 총알을 막으려고 입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음력 4월이었기에 양력으로는 6월이라 상당히 더운 시기였고 솜에 적신 물이 금방 말랐으며, 함포사격으로 인해서 솜옷에 불이 붙어서 총에 맞아 죽은 숫자보다 불에 타 죽은 숫자가 더 많았으며, 옷에 불이 붙어서 강화해협에 뛰어들어 익사자가 많이 생겼다.
광성보 전투 자체는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투로 인해서 끔찍한 경험을 하였다. 이후 미국은 돌아갔다.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미국 장교나 병사들의 글을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진정한 야만이 무엇인지 보았다’는 기록이나, ‘조선이라는 이름 없는 나라에서 했던 전쟁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에 항복하는 조선인은 한 명도 없었고, 총알이 떨어지면 돌을 던졌고, 흙을 던지면서 저항하는 조선인들과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차라리 강물에 뛰어들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음을 택하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마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은 야만 그 자체였을 것이다. 솔직히 조선 후기는 서양인들의 시각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약체였고 더러운 민족이었을 것이다. 성리학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기술문화가 침체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송나라 사람 서긍이라는 인물이 고려 인종 때 고려를 여행하고 『고려도경』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에 의하면 ‘고려인들은 정말 깨끗하다’, ‘목욕하기를 좋아한다’, ‘중국인들의 더러움을 비웃는다’고 전한다. 솔직히 서양도 17세기 근대화되기 이전에는 우리보다 더 더러웠다. (우리는 중세적 습관을 구한말까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럽다고 인식된 것이다)
구한말에 서양의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그들의 조선에 대한 첫 인상은 ‘더럽다’, ‘불결하다’였다.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의 초가집들을 차마 사람이 산다고 상상하지 못하고 ‘외양간’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버섯단지).
서양의 선교사들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고 한다. 초가집의 지푸라기 바닥이 상당히 불결했을 것이고, 조선인들이 입고 있는 흰옷은 때가 묻어서 더 더러워 보였다고 한다. 3살부터 70살까지 담배를 즐겨 피웠기 때문에 초가집에 담배 연기가 배여있었다. 조선인들의 머리스타일은 상투였는데 머리를 감지 않아서 위생적으로 상당히 더러웠다고 한다. (사실 상투 안쪽 머리를 밀어야 상투를 제대로 틀수 있었다) 전투 중에 상투가 풀어지면 머리가 헝클어져 무릎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다가 조선인과 함께 감옥에 갇히는 경우에는 거의 미쳐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이 한 달을 안씻으면 몸이 적응을 하기 때문에 나름 조선인들은 적응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은 17세기 이전에는 조선보다 더 더러웠다. 물론 구한말의 조선은 객관적으로 더러웠을 것이다. 인정은 하되 그것 때문에 폄하하지는 말자. 어렸을 때는 자기의 부모가 최고였다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옆집 부모가 더 잘난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렇다고 옆집 부모를 자신의 부모보다 사랑할 수 있나? (이것이 소위 요즘 토착왜구들의 모습이다) 그래도 우리 조상이고, 우리의 국가이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인이 바라본 조선은 끔찍했었다. 그렇지만 용맹함은 인정할 수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끝까지 저항하려는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조선인들은 서양 미국인들을 도깨비로 인식했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도깨비에게 잡혀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저항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신미양요를 통해서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사과를 받아낸 것도 아니고, 통상수교를 받아낸 것도 아니다. 조선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여주었기에 미국이 물러갔고, 결국 무력을 통한 개항은 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원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게 된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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