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14] 젊은 친구들은 왜 개혁을 꿈꿨나?
대원군 집권이 끝나고 민씨척족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강화도조약(1876)이 체결되었고, 1880년대에 개화정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부정부패, 민씨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1) 개화정책이 중단되었고, 2)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으며, 3) 민비는 장호원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압송하면서 민비는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당연히 청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재정고문 마젠창,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군사고문 위안스카이). 임오군란으로 인해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주둔(1882년 제물포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개화론자들은 박규수(1807~1877), 중인 출신 통역관 오경석(1831~1879), 한의사 유홍기(유대치, 1831~1884?) 등이 있다. 이들을 초기통상개화론자라고 부른다.
오경석의 집에 김옥균(1851~1894), 박영효(1861~1939), 박영교(1849~1884), 홍영식(1856~1884), 서광범(1859~1897), 서재필(1864~1951) 등이 모여서 개화사상을 공부하게 된다.
임오군란 이후에 개화세력이 온건개화파(청의 내정간섭을 수용), 급진개화파(메이지유신 표방)로 나뉘어진다. 청나라의 개화운동(양무운동, 1861~1895)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을 표방했다. 온건개화파는 청의 개화운동을 본받아서 ‘동도서기’(東道西器)를 표방했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 등이 온건개화파를 이끌었다. 급진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있었다. 급진개화파는 자신들을 개화당(독립당)이라고 하고 온건개화파를 사대당(수구당)이라고 불렀다. 온건개화파는 민비와 친했고, 급진개화파는 고종과 친했다고 할 수 있다.
개화를 하려면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온건개화파는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조언에 의해 당시 화패의 5배 가치가 있는 ‘당오전’을 만들자고 한다. 이때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을 반대하고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주장하였다. 김옥균이 막상 일본에 갔으나 차관을 빌려오지 못했다.
실의에 빠져있던 김옥균은 이때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1842~1917)와 만나 은밀하게 쿠데타를 계획하게 된다. (당시 청이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조선에 주둔한 병력 3천 중에서 절반을 뺐다)
쿠데타를 계획한 인물들은 나름 잘나가는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김옥균(안동김씨), 박영효(철종의 사위), 홍영식(영의정 집안), 서광범(판서 집안), 서재필(급제자) 등이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고 ‘우정국개국축하연’ 때 온건개화파를 숙청하기로 계획하였다. 이것이 바로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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