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11] 정한론과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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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근대11] 정한론과 개항

by [수호천사] 202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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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11] 정한론과 개항

 

 

대원군 집권기(1863~1873)는 최익현의 상소로 끝나고 이후 민씨척족정권이 시작된다.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이었는데, 당시에 박규수 같은 인물은 초기통상개화론자였지만 대원군이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민씨척족정권이 들어서면서 개화론자들이 문호를 개방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1876년에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1854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의 함포외교로 개항을 하게 되었고,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의 시기에 집권했던 대원군은 조선의 근대화에 발목을 잡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쇼군이 정치를 주도하고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이 통치하는 왕정복고를 단행한 것이다. 이후 일본이 조선에 보내는 문서에는 조선을 신하라고 표현하였고, 이것에 당연히 기분이 상한 조선이 그 문서를 무시하게 되고 (무시당한) 일본은 이후부터 ‘정한론’이 대두되었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것은 삿조동맹(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이었고, 대표적인 인물인 요시다 쇼인(1830~1859)이라는 사람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일본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근대화를 함과 동시에 대만과 조선과 만주를 지배해야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이토 히로부미(1841~1909).

 

 

메이지 유신으로 갑자기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들을 이끈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3)에서의 일본인 주인공인데 대표적인 정한론자였다. 당시 미국처럼 조선을 개항시켜서 경제적 이익을 꾀하자는 온건파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군함을 사들였는데 이것이 운요호(운양호)였다. 운요호는 강화도의 초지진에 나타났고, 초지진에서 선제공격을 했지만 사정거리가 턱없이 부족했으며, 이를 핑계로 운요호가 이틀간 포격을 시도해서 초지진이 박살나버렸다.

 

 

결국 강화도 연무당이라는 곳에서 신헌(1810~1884)이 조선의 대표로 나서서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것이 바로 강화도조약(1876, 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규)이다. 이 조약에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항을 기억해야 한다.

 

 

1. 조선은 자주국
4. 부산 외 항구 2(인천과 원산) 개항
7. 해안 측량권
10. 치외법권

 

이 강화도조약 부속조약으로 조일통상장정(조일무역규칙)’으로 양곡의 무제한 유출과 무관세 조항이 적용되었고, 조일수호조규 부록이 체결되었다.

 

당시 개화론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규수(1807~1877)가 있었고, 이항로(1792~1868)의 제자 최익현(1834~1907)이 일본과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면서 ‘왜양일체론’을 주장했다. 그는 조선은 땅에서 나는 농작물을 수출하지만, 일본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생필품을 수출하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농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고 주장했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부터 파견했던 통신사(1607~1811)수신사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수신사(1876)로 김기수를 파견하였는데, 김기수는 돌아온 후에 일동기유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2차 수신사(1880)는 김홍집이었는데 그는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활동중인 청나라 사람 황쭌센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책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황쭌센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그 책을 썼다고 한다. 당시에 청나라는 아편 전쟁 이후 베이징조약(1860)으로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할양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점차 진전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연해주에 블라디보스톡’(동방의 지배자)이라는 도시를 만들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톡은 겨울이면 항구가 얼기 때문에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찾고 있었다. 당연히 조선의 항구가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고종이 완전 바보는 아니었다. 고종은 나름 개화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1881년에 일본에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 파견하였다. 당시에 조선의 유생들이 신사유람단 파견을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고종은 박정양 등을 암행어사로 위장해서 파견하였다.

 

이후 미국과 수교하려고 했을 때 영남의 유생들이 조선책략 유포를 반대하고, 미국과 수교를 반대하며,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영남만인소(1881)를 고종에게 올리면서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과의 조약이 1882년에 체결되었는데 역시 불평등조약(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 조항이 있었음)이었는데 거중조정으로 두 나라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주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1905년에 조선이 을사늑약을 통해서 외교권이 박탈되었을 때 거중조정을 언급하면서 미국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미국은 그 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으로 일본과 거래를 했기 때문에 모른척 하였다.

 

조선은 1883년에 영국, 독일과 수교를 맺었다. 러시아는 청이 소개해 주지 않고 있었는데 러시아인 베베르가 민비와 친하게 지내면서 1884년에 수교를 맺었다(1884년 조러통상조약, 1885년 조러비밀협약). 1886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면서(조프통상조약) 프랑스에게 천주교 포교권을 허락하게 된다.

 

[조선과 각국의 수교]

  • 일본 - 1876
  • 미국 - 1882
  • 영국, 독일 - 1883
  • 러시아 - 1884
  • 프랑스 -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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