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본문 바로가기
[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by [수호천사] 2021. 6. 20.
반응형

[근대12] 내가 조선의 궁녀다. (33분 순삭 ver.)

 

 

1880년대 초반 개화 정책으로 의정부와 6조 사이에 개화를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었다. 그리고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여 구식군대로 개편하고, 신식군대로 별기군을 창설한다. 조사시찰단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영선사를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에는 국고가 탄탄했다. 그런데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민비는 모자란(자폐증세가 있는) 순종의 건강을 위해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살을 투하하고, 고종은 매일 잔치를 벌이며 흥청망청 국고를 탕진하기 시작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하루에 왕과 왕비가 쓰는 돈이 천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이 10년간 비축한 재산을 고종과 민비가 1년만에 탕진한 것이다. 민비가 정권을 잡은 뒤에 여흥 민씨를 중용하기 시작했고, 주요 관직은 민씨 일족이 장악하였다. 민씨의 세상이 된 것이다.

 

당시 권력은 민비의 의남매인 민승호(1830~1874)와 그의 동생인 민겸호(1838~1882)에게 있었다. 민비는 흥선대원군의 처남인 민승호, 민겸호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흥선대원군의 친형인 이최응을 영의정으로 만들어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민승호는 스님이 보낸 선물을 열어보다가 선물이 폭발하면서 죽게 된다. 그는 죽기 전에 대원군이 기거하는 운현궁을 가리키며 죽었다고 한다. 민승호의 대가 끊어질까봐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1860~1914)이 양자가 된다. 민영익을 민비가 아꼈기 때문에 나중에 갑신정변 때 민영익이 칼침을 33방 맞고 사경을 해매다가 알렌의 서양식 의술을 통해서 살아나게 되었을 때 민비가 알렌의 소원(서양식 근대병원)을 들어주어 홍영식 일가를 쳐죽이고 그의 집을 알렌에게 주어서 광혜원이라는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우게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의 시작]

 

민겸호는 당시 선혜청 당상관이었는데, 선혜청은 나라의 쌀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당시 구식군인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려있었다. 나라가 망하려고 할때 권력자들은 백성을 버리더라도 자신들을 지켜주는 군인들은 제대로 먹이는 법인데, 민씨척족정권은 구식군대를 홀대한 것이다. 마지못해 월급을 한달치 주게 되는데 그것도 쌀에 흙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난 구식군인들은 들고 일어나서 민겸호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민겸호는 집에서 맞아죽었다는 설이 있고(군인들에게 밟혀서 창자가 터져 죽었다는 설), 한편으로는 탈출해서 궁궐에 숨어있다가 흥선대원군 앞에서 맞아죽었다는 설이 있다. 민겸호는 Dog 새끼였지만 민겸호의 아들은 나름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민영환(1861~1905)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구식군인들은 민겸호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다 불태워버렸다.

 

 

구식군인들은 영의정이었던 대원군의 형 이최응을 잡아죽였다. 항문으로 창을 꽂아서 입으로 뽑아서 죽였다는 설이 있고, 담벼락을 타고 도망치다가 발을 헛디뎌서 낭심이 터져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

 

구식군인들의 봉기(임오군란)으로 신식군인인 별기군 박살나고 일본인 교관도 돌에 맞아 죽었다. 이때 서울의 빈민들도 합세하였는데, 이들의 구호는 민비를 잡아죽여라!’였다고 한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1826~1882)은 민겸호 이전의 선혜청 당상관이었는데 구식군인들에게 잡히게 되었고, 구식군인들이 산채로 입에 돈을 쳐넣어서 죽였다고 한다.

 

이때 민비의 호위대장은 홍계훈(1842~1895)이었는데(후에 민비가 죽을 때 함께 죽었고 민비의 목숨을 여러번 구했기 때문에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라는 영화도 만들어졌다), 홍계훈이 민비를 가마에 태우고 탈출을 시도하였다. 도중에 구식군인들에게 잡혔는데, 홍계훈은 민비를 자신의 누이라고 말하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민비의 탈출에는 홍계훈과 함께 축지법의 대가인 이용익(1854~1907)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용익은 보부상 출신으로 힘이 장사였고, 서울에서 전주까지 하루만에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축지법의 대가였다고 한다. 민비 일행이 한강까지 와서 나룻배를 타야 하는데, 재집권에 성공한 흥선대원군이 누구도 한강을 건너게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뒤였기에 민비는 금가락지를 뇌물로 바치면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도망치는 도중에 어느 마을의 국밥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국밥집 노파 주모가 우리 새색시가 시집을 가야하는데 나쁜 왕비년 때문에 시집도 못가고 서울에 난리가 나서 어떻게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민비 일행은 여주까지 도망을 쳐서 충청도 충주 장호원(경기도 이천 장호원)의 민응식 집에 숨어서 살았다.

 

1873년에 하야했던 흥선대원군이 10년만인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민비를 끝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구식군대의 주장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은 이미 권력을 잃은 민비가 그냥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으니 내버려 두라고 했다는 설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설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민비의 옷가지를 모아서 장례까지 치룬다. 조용히 죽어지내라는 경고일 수도 있고 살아있다면 죽이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

 

민비는 이용익을 통해서 자신의 서신을 고종에게 전달한다. 민비는 고종에게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흥선대원군이 조선에 있으면 안되니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대원군을 잡아가게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용익과 고려대학교]
나중에 이용익은 관찰사까지 승진하였고, 많은 재산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나름 재산을 의미있는 곳에 사용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독립운동까지 했는데, 자신이 번 돈으로 1905년 보성전문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후에 천도교계로 잠깐 흡수됐다가 나중에 경성방직공장의 사장이자 동아일보의 사주이고, 후에 한민당의 당수이자 부통령까지 지낸 김성수(1891~1955)가 인수하여 오늘날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김성수는 친일의 흔적이 있고, 김성수의 친동생 김연수(1896~1976)은 반민특위에 의해 박흥식 다음으로 두 번째로 끌려간 인물이다.

 

 

대원군은 다시 집권하면서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고, 2군영을 다시 5군영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별기군을 해체시켰고 영선사를 조기 귀국시켰다. 민비의 편지에 의해서 영선사로 갔다가 조기 귀국한 김윤식이 다시 청나라로 가서 청나라 총리 이홍장(1823~1901)을 설득해서 청나라 군대를 데리고 들어오게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김윤식이 조기 귀국하지 않고 청나라에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는 일단 대원군을 안심시킨 후에 갑자기 납치해서 청나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민비가 궁궐에 돌아오게 되었다.

 

민비는 궁궐에 돌아온 후에 대원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목을 다 날려버렸다. 그리고 피난 도중에 만났던 주막집 노파를 죽이려다가 파악이 안되니 그 마을 사람들을 다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흥선대원군을 잡기 위해서 온 청나라의 인물은 위안스카이(1859~1916)로 후에 중국의 총통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는 용산에 청나라 군대 3천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후 용산은 청일전쟁 때에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1894), 한국전쟁 이후에(1953)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서울 한복판에 외국군대가 주둔하게 된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 임오군란이고,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민비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군대를 주둔하면서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정고문은 마젠창이었고, 외교고문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였으며, 군사고문은 위안스카이였다.

 

조선은 청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을 체결하였는데,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의 내륙까지 들어와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조선 관리의 제안에 따라 ‘조선은 청의 속박이다’라는 내용이 명문화되었다.

 

임오군란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물포조약(1882)을 통해서 일본공사관을 지키기 위해 7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 때 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돌할 뻔한 위기가 있었고, 외교적으로 청과 일본이 공동파병권을 갖기로 하고 양쪽의 군대가 공동으로 철병한 후에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을 핑계로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맞붙게 된다.

 

삼국통일을 달성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때 김춘추는 철저하게 당나라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름 자기들의 나라(신라)의 국익을 위해 한 일이었다. 그런데 민비는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욕을 위해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다.

 

1882년 당시 위안스카이는 24세였으며, 이때부터 조선은 민비의 나라가 아니라 위안스카이의 나라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을 발표할 때 1조가 대원군을 즉시 환국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주변의 사람들이 반대하였을 때, 김옥균이 그들을 설득하면서 한 말이 있다. “나 안동 김씨요!” 대원군은 이 나라 왕의 아버지, 국부라고 할 수 있다. 국부가 다른 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어서야 어찌 자주국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728x90
반응형

댓글


TOP

TEL. 02.1234.5678 /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