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15] 갑신정변, 그러나 삼일천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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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근대15] 갑신정변, 그러나 삼일천하...평가

by [수호천사] 2021.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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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15] 갑신정변, 그러나 삼일천하...평가

 

 

임오군란으로 청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서 개화파도 온건개화파급진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청의 내정간섭을 받아들인 온건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중체서용)을 본받아 동도서기론을 전개하려고 하였고,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처럼 나라 전반의 개혁을 하자는 주장을 했다.

 

  • 온건개화파(수구당ㆍ사대당) : 김홍집, 김윤식, 민영익
  • 급진개퐈파(개화당ㆍ독립당) :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일행은 일본군을 끌어들여 청을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준비한다. 이것이 갑신정변(1884)으로 우정국개국축하연 때 거사를 진행하였다. 김옥균과 박영효 일행은 우정국 거사 후에 창덕궁으로 들어가서 고종과 민비를 만나고 그들을 경우궁으로 이동시켰다. 다음날 왕의 명령으로 조영하(1845~1884), 민태호(1834~1884), 민영목(1826~1884) 등의 온건개화파들은 입궐하다가 황천길로 간다. 그리고 다음날 밤부터 새벽까지 마라톤 회의를 하였고, 14개조 정강을 발표하였다.

 

[갑신정변 14개조 정강]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부패를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해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이 정강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조] 어쩌면 급진개화파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흥선대원군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가문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국부를 돌아오게 함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세우려는 의지였다. 반면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서 청나라를 끌어들여 자신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잡아가게 만든 민비는 답이 안나오는 인물이다.

 

[2조] 자신들이 어마어마한 금수저 집안의 문벌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인민 평등권을 주장하려고 하였다. 올바른 일이라면 나에게 손해가 될 것을 감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3조] 조세제도의 개혁이다.

 

[12조] 재정을 일원화하려고 한 것이다.

 

[13조, 14조]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개혁은 오래가지 않았다.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너무 발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오판도 있었다. 일본은 1874년에 대만을 침략했을 때 청나라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청이 소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민비가 다시 창덕궁으로 가자고 주장했고(경우궁은 작은 궁이어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창덕궁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도 창덕궁으로 가자고 했다. 곧이어 청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청과의 전면전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일본이 발을 빼면서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홍영식을 제외한 급진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고, 홍영식의 집안을 처단한 민비는 당시에 민영익의 부상을 고쳐준 선교사 알렌에게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1885)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준다(이것은 후에 제중원을 거쳐 세브란스 병원이 된다).

 

갑신정변은 1884124일부터 126일까지 3, 46시간동안 급진개화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삼일천하라고도 한다. 이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1)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토지개혁 등이 있었더라면 백성들은 환영했을 지도 모른다), 2) 일본을 등에 업고 실시한 쿠데타였기 때문에 더더욱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의하면 혈기가 이들의 지혜를 눌렀다고 평할 정도로 당시에 쿠데타 세력은 너무 젊은 세대였다. 오늘날보다 장유유서가 더 강하게 인식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개혁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의 행동으로 인식된 것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부터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까지 민비의 집권기는 세도정치기 이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갑신정변 때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면서 한성조약을 체결하면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 조선은 이후 1889방곡령으로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더더욱 힘들어졌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청나라 텐진에서 이홍장과 조약을 맺었다(텐진조약). 여기에서는 일단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위를 인정하였지만 양국의 군대를 철병하기로 하고 훗날 어느 한 나라가 군대를 파병할 때 공동파병을 하자는 공동파병권에 합의하게 된다. 이것은 훗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지 못하는 조선이 청나라를 다시 끌어들이면서 청일전쟁의 빌미가 된다. (자신의 나라 백성들을 잡아 죽이자고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이게 된 민비와 고종에 대해서 어떤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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