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임진왜란 발발(1592년 4월) 두 달만에 평양성을 빼앗겼다가(1592년 6월) 6개월만에 평양성 탈환하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에서 1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이 1만여 명의 수급에는 상당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양성에는 순왜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되어 이여송이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 부대가 절실했던 조선의 조정에서 이여송을 변호해 주는 일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한 고니시의 전투목록은 아래와 같이 임진왜란 초기의 대부분의 전투를 고니시의 부대가 치렀으며, 그 와중에 조금씩 병력의 손실이 생겼을 것이다. 18,700명의 병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으로 살아돌아갈 때 불과 5..
북망민족으로 중국을 침략해서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만주와 중원을 장악한 여진족의 금나라... 금나라 시조는 고려 사람인가?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본기〉는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는 고려 사람이다. 처음에 고려에 왔을 때 이미 나이가 60여 세였다. 그 형인 아고내(阿古迺)는 부처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러 있으면서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며 금나라 시조가 고려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금국지(大金國志)》의 〈금국초흥본말(金國初興本末〉(금나라가 처음 흥한 본말)은 시조에 대해 “본래 신라인으로 성씨는 완안(完顔)씨이다. 완안은 중국어로 왕과 같은 말이다”라고 적고 있다. 여진족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것은 금나라 시조가 신라에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은 고려를 섬겼지만 ..
북방민족으로 중원을 위협한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진 ‘요’나라는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에서 ‘발해’를 무너뜨린 나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요나라를 세운 ‘야율씨’가 고구려의 ‘고씨’의 후예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요나라 왕실은 고구려의 후예인가? 1986년 내몽골 통료(通遼)시 내만기(奈曼旗) 청룡산에서 요나라 진국공주(陳國公主, 1000~1018) 야율씨의 부부 합장묘와 가 발견되었다. 에 따르면 공주의 성씨는 요나라 황성(皇姓)인 야율(耶律)씨로서 경종(景宗)의 손녀이다. 그 아버지는 경종과 황후 소작(蕭綽)의 둘째아들이자, 요 성종(聖宗)의 동생인 진진국왕(秦晉国王) 야율융경(耶律隆慶, 973~1016)이다. 진국공주는 부마도위 소소구(蕭紹矩)에게 시집갔으나 그만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 중 평양에서의 4차례 전투가 있었다. 제1차 평양 전투 - 1592년 6월 15일(왕성탄 전투, 평양성 점령당함) 제2차 평양 전투 - 1592년 7월 17일(조승훈 패배) 제3차 평양 전투 - 1592년 8월 1일(조선군 패배) 제4차 평양 전투 - 1593년 1월 8일(이여송 승리, 평양성 탈환) 제1차 평양 전투(1592.6.15) 선조는 대동강까지 진격한 일본군을 보고 의주까지 도망가면서 윤두수(1533~1601), 김명원(1534~1602), 이원익(1547~1634)에게 방어하라고 시켰다. 평양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쪽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벽도 잘 수축되어 있었다. 수비를 하던 조선군이 의외로 선제공격을 하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병사들이..
[8분 정도까지 복습모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하고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한다(5월 3일에 한양을 빼앗김). 원래 일본군은 한양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가 도망가면서 전쟁이 꼬이게 되었다. 한양까지만 대비하고 건너온 일본군은 한양 이북의 지도나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진격하는 데에는 40일이 걸렸다(6월 15일). 명나라 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약간의 식민사관에 묻혀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한 전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고니시가 평양 이북으로 진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부대 감소와 사기 저하 보급로 끊김 의병에 대한 두려움 명군 참전에 대한 두려움 추위에 대한 공포 한편 요..
일본인들은 단군을 승려 일연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한의 강단사학도 아직까지 단군을 신화로 보고, 고조선은 아무리 빨라야 서기전 10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논리로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을 부인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을 남한의 식민사학자들이 그대로 추종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무리 중국을 사대했어도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것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었다. 『삼국유사』의 가장 첫 부분에는 왕의 계보를 적어놓은 왕력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이 왕력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조’의 ‘동명성왕은 추모왕이라고도 한다.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써 놓았다. 고구려는 단군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라는 말이다. 부여도 마찬가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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