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상 & 유투브]210 [병자호란12] 원균을 넘어서는 최악의 똥별들 [병자호란12] 원균을 넘어서는 최악의 똥별들 강화도의 북쪽 갑곶에는 충청도 수사 강진흥(?~1637)이 판옥선 7척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인 광성보에는 강화유수 장신(?~?)이라는 인물이 판옥선을 27척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강화도를 점령한 인물은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홍타이지의 동생인 도르곤(1612~1650)이었다. 도르곤이 1만 6천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강진흥의 수군은 건너편 육지에서 쏘는 포(홍이포)에 의해 수세에 몰렸다. 그래도 강화해협을 건너려는 청나라 군대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광성보를 지키는 장신이 도우러 올라갔어야 하지만 장신은 모른척 하였다. 장신의 부하 구원일(1592~1637)이 칼로 장신을 죽이려고까지 할 정도였다. 구원일.. 2021. 7. 4. [병자호란11] 세계최강 몽골 vs 아시아 최강 청나라 [병자호란11] 세계최강 몽골 vs 아시아 최강 청나라 강화도는 최적의 요새로 금성탕지(金城湯池, 쇠로 만든 성곽과 끓는 물로 채운 연못)라고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세계 최강 몽골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강화도가 조선시대에는 아시아 최강 청나라에게 점령당해버렸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강화도가 청나라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봉림대군(훗날 효종, 1645~1649), 소현세자(1612~1945)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1611-1646) 등이 사로잡히게 된다. 세계 최강 몽골도 물리쳤던 강화도가 청나라에게 점령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1. 청군은 용산에서 배를 건조한 후 수레에 싣고 강화해협까지 옮겼다. 2. 간척사업으로 인해 강화해협의 물살이 약해졌다. 3. 청나라 .. 2021. 7. 4. 유투버 황현필 선생의 ‘근대’ 총정리 유투버 황현필 선생의 ‘근대’ 총정리 유투브에서 자주보는 한국사에 대한 강의 영상 중에 ‘근대 역사’에 대해서 황현필이라는 강사가 강의한 영상이 있다. 이 영상은 한 번 보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라 이곳에 정리를 해 두려고 한다. (각 제목을 클릭하면 정리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1] 근현대사 시작(시대구분 & 식민지 근대화론) [근대2] 세도정치기와 흥선대원군의 등장 [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근대4] 대원군 vs 천주교(Feat. 병인박해) [근대5] 병인양요와 KTX [근대6]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백두혈통 [근대7]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한 진짜 이유(Feat. 풍수지리) [근대8] 19세기 열악함, 그래서? (20분 순삭v.. 2021. 7. 2. [근대25] 을미사변(2) 국모와 이완용, 일본(10분 숨안쉬어지는ver.) [근대25] 을미사변(2) 국모와 이완용, 일본(10분 숨안쉬어지는ver.) 1895년 을미사변 솔직히 민비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자신 개인의 권력과 자신의 여흥 민씨 집안의 안녕과 자기 아들이 왕을 이어받아 권력을 계속 누릴 것만을 생각했던 여자다. 흥선대원군이 10년간 모아놓은 재산을 1년 만에 탕진한 여인이다. 임오군란(1882년) 당시에 자신의 개인 권력을 위해 외국(청) 군대를 끌어들였다. 갑신정변(1884년) 때에도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동학농민운동(1894년) 때에 자기 백성을 도륙하도록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여자이다. 청일전쟁 이후에 러시아의 강성함을 보고 러시아를 끌어들인 여자다. [만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더라면, 우.. 2021. 7. 2. [근대24] 을미사변(1) 일본인이 양심적으로 쓴 그날의 보고서 [근대24] 을미사변(1) 일본인이 양심적으로 쓴 그날의 보고서 [이 영상은 너무 참혹한 진실을 담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성인 인증을 해야만 볼 수 있습니다] 민비(1851~1895)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요동반도를 되돌려주고 일단 찌그러든 일본... 이후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갑오개혁(1894)으로 1차 김홍집 내각, 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 모두는 친일내각이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부상하면서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김홍집 친러내각이 구성되었다. 청일전쟁 이후에 별로 얻은 것도 없다고 생각한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인 민비를 제거해야 겠다는 갱각을 한다. 작전명... [여우 사냥] 민비는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민비는 눈이 양옆으로.. 2021. 7. 2. [근대23] 일본은 왜 조선의 왕비를 시해했을까? [근대23] 일본은 왜 조선의 왕비를 시해했을까?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이 전개되었고, 동학군을 진압할 수 없었던 조선 정부가 청나라를 끌어들였고 텐진조약(1885)에 입각해서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일본이 6월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7월에 일본이 조선의 내정개혁에 착수하라고 하면서 강제로 개혁을 실시한다(갑오개혁, 1894). 당시에 일본은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군국기무처’를 만든다(타율적 개혁기구). 출발은 타율적이지만 나름 조선의 관료들이 군국기무처에서 어마어마한 개혁을 실시한다. 정치적인 면에서 일본의 입김이 작용해서 궁내부를 설치해서 민비의 정치참여를 견제하였다.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고려 광종 때 ‘광덕, 준풍’이라는 .. 2021. 7. 2. [근대22]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진짜 이유 [근대22]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진짜 이유 청일전쟁 이전에 일본은 오키나와 점령(1872)하고 대만을 침략(1874)했었다. 그런데 이때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때 청나라는 일본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오키나와와 대만은 포기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청나라가 추가로 병력을 서해로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의 안산 단원구 풍도동 앞에 있는 바다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박살내 버렸다. 청일전쟁의 가장 큰 전투는 평양 전투였는데(1894.9.15~17) 여기에서 일본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당시 청나라 군사 2천명이 죽고 4천명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일.. 2021. 7. 2. [근대21] 일본의 국가정신 사무라이? 닌자? [근대21] 일본의 국가정신 사무라이? 닌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 1894년 1월 고부민란에서 12월 전봉준의 체포까지... 당시의 역사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기술하였다. 음력이 양력으로 바뀌게 된 때는 을미개혁(1895)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는 음력으로 서술되는 것이 원칙이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1894.4.27)한 후에, 멍청한 고종과 민비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는데,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에 체결한 텐진조약(1885)에 의해서 일본의 군대도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청나라가 1894년 5월 5일에 아산만으로 상륙하였고, 일본군은 1894년 5월 6일에 인천으로 상륙한다. 두 나라가 전쟁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서 동학군은 전주화약(1894.5.8)을 체결하고 해산한다... 2021. 7. 2. [근대20] 동학3 - 우금치 전투(눈물 주의 그러나 멋있음) [근대20] 동학3 - 우금치 전투(눈물 주의 그러나 멋있음) 1894년 4월 동학농민군 1차 봉기 : 반봉건 1894년 9월 동학농민군 2차 봉기 : 반외세 1차 봉기 때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전봉준에게 반대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자 2차 봉기 때는 최시형도 동참하기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시형의 명을 받은 손병희가 북접을 이끌고 논산으로 내려왔고, 남접의 전봉준과 연합하였다. 논산에서 2만 명의 동학군이 죽창 들고 짚신 신고 공주로 진격해 올라갔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이 진압하러 내려왔다. 동학군은 우금치 고개에 매복해 있는 관군과 일본군을 정면돌파해서 뚫고 진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 관군은 미국에서 만든 신식무기(개틀링 기.. 2021. 7. 2. [근대19] 동학2 - 백성 잡자고 외국 군대 끌어들이는 왕과 왕비 [근대19] 동학2 - 백성 잡자고 외국 군대 끌어들이는 왕과 왕비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조선역사상 가장 큰 민란이라는 것이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전주 이씨)가 있는 곳을 점령당한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 고종이 먼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자는 제안을 하였고, 당시 관료들이 반대를 하였다. (민씨척족정권의 관료들조차 반대하였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다면 텐진조약(1885)에 입각해서 일본 군대도 조선땅에 들어오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조선 땅이 양국의 전쟁터가 될 것이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종과 민비는 당연히 청나라가 이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과는 달리 국력이 성장한 일본은 청나라와 한판 뜨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기 .. 2021. 6. 30. 이전 1 ··· 5 6 7 8 9 10 11 ··· 2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