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출정한 일본의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서 밀양을 거쳐 대구를 격파하고 상주로 진격하여 조령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제2선발 가토 기요마사는 경주를 거쳐 죽령으로전진하고 있었으며, 제3선 발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는 김해를 공격하면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역제도는 오랜 기간 평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국방력은 약하지 않았다. 세조가 만든 보법제는 3인 1조로 구성되었으며, 한 명이 정군으로 선정되면 나머지 두 명의 경비를 충당하는 체제였다. 조선이 기본적으로 양인개병제였으나 양반과 상인, 중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병사로 차출되지 않았으며, 농민들만 병사로 차출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병농일치). 당시 군역 말..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에게 털렸던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의 문제였지,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인물들은 우리가 기억해주고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동래성 전투 직후의 상황을 알려면, 당시 경상도를 지키고 있는 육군과 수군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경상도를 책임지는 관찰사는 김수였다. 육군에는 경상좌병사 이각이었고, 경상우병사는 당시에 김성일로 교체되는 시기였다. 수군은 경상좌수영 박홍과 경상우수영 원균이었다. 박홍은 바다에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동래성에 합류했다가 도망쳤으며, 원균은 판옥선 70여척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도망쳐서 동래성 전투 당시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부산성(정발 장군 전사)과 다대포(윤흥신 장군 전사)가 함락된 후 일본군..
[이덕일의 한국통사] 식민사학 비판했다가 대한민국 검찰이 기소해서 1심 유죄 판결 이야기 일본이 조작한 한사군 평양설과 임나일본부설을 젊은 사학자들 추종 #2 2016년도에 이덕일 선생이 식민사학을 비판하다가 자랑스런(?) 대한민국 검찰이 그 식민사학 비판한다고 기소해서 재판받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긴 나중에 다시 말한다고 한다) 그때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니까, ‘이때다’ 라고 완전히 죽이려고 여러 세력들이 달려 들었다고 한다. 그때 『역사비평』이라는 역사 잡지에서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주제로 두 번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연재를 했다. 『역사비평』은 근현대는 어떤지 몰라도 고대사 부분은 총독부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는 ‘총독부 기관지’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조선총독부..
[이덕일의 한국통사] 한국통사 출간 배경 다시 찾는 7천년 우리역사 이야기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일제 조선총독부 역사관에서 독립운동가들 역사관 한 권의 책으로 담아 이야기 #1 광복 이후 7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나라 역사학 인식체계는 왜 아직도 식민사관이란 비판을 받을까? ‘식민사관’이란 한마디로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큰 틀에서 말하면 ‘황국사관’(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역사를 고대사부터 근현대까지 바라보는 황국사관)의 일부가 식민사관이고, 식민사관을 압축하면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며 우리는 그 역사관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나서 보니까 지배하기가 아주 힘든 것을 발견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한 서양인의 눈에 ‘지배당하는 한국인들은 도포 입고..
이덕일 선생은 자신이 왜 역사학을 하게 되었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함석헌 선생의 자서전인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을 보았다. 당시에는 유신체제로 고등학교에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소풍을 가도 교련복을 입고 4열 종대로 행진하면서 소풍지까지 가는 군국주의가 아주 기승을 부리던 시대였다. (그때부터 이덕일 선생은 체제내 제도권 교육하고는 별로 맞지 않았었다고 한다) 함석헌 선생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셨다. 이 분은 박정희 정권에 상당히 대립하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분이 결국은 역사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책을 구해서 ..
2. 다대포 전투(1592. 4.13 ~ 14.) 다대포성을 지키던 윤흥신 장군은 일본군을 하루동안 막아냈다고 한다. 처음에 다대포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척 하였을 때, 일본군은 성을 쉽게 점령해서 안심하고 노략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윤흥신 장군의 부대가 다시 쳐들어와서 일본군을 몰살하고 성을 다시 접수하였다. (최종적으로는 패했지만 처음에는 승리한 전투였다) 이후 추가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점령당한다. 윤흥신 장군은 윤임의 다섯 번째 아들로 윤임은 을사사화(1545) 때 소윤(윤원형)과 대결한 대윤의 거두였다. 윤임은 중종의 왕후였던 장경왕후의 오라버니였다고 하니, 윤흥신 장군의 고모가 왕비였다는 말이다. 비록 윤임의 집안이 몰락했지만 무력이 뛰어나서 다대포의 첨사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다대포성을 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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