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170 [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임진왜란49] 원균 재평가? 미치셨나요? 최근 원균의 후손들과 원균의 고향 평택시에서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작업이 있다. 원균이 재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인가? 원균은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 판옥선 74척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1만여명의 병력을 해산하고 튄 인물로, 일본군이 경상도에 쉽게 상륙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인물이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 무능력함도 보여주었고,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을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원균을 재평가해서 띄우려는 어처구니 없는 평택시에 대한 기사 한국사를 가르치는 선배 중에 1881년에 청나라 무기를 배우기 위해 청나라로 건너갔던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의 고손자인 분이 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 2021. 4. 28.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임진왜란48] 정유재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재침략한 이유와 목적(사명당vs가토)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조선, 명나라, 일본은 휴전기간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조선은 배제된 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명나라측에서는 심유경(1526~1597)이 나섰고, 일본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가 회담에 응했다. 이때 심유경은 명나라 사신 2명과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7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7가지 요구사항]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명나라와 일본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관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감합무역 :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대신이 통교를 서약.. 2021. 4. 28. [역사 속 외국인1] 호머 헐버트 해당 영상은 8분이 조금 넘는 짧은 영상이기 때문에 한번 보시길 권한다 호머 헐버트(1863~1949) 수능 한국사와 관련되어 헐버트는 많은 부분 언급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학은 원산학사(1883)인데, 최초의 근대적 관학은 육영공원(1886)이다. 이 육영공원에서는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의 상류층 자제들에게 영어를 강의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외국인 선교사가 헐버트였다. 그리고 헐버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세계 지리 역사교과서인 『사민필지』(1891)를 만든 인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운동 일환으로 고종은 미국에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했다(1905년). 이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있는 ‘거중조정’(제3자적 입장에서 분쟁당사국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는 것)을 믿고 취한 조치.. 2021. 4. 27. [임진왜란47] 백의종군, 이순신도 많이 울었다.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충청도 병마사, 전라도 병마사로 가 있던 원균은 자신이라면 부산을 공격할 것이라는 장계를 올린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다만 수륙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이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펼치고, 1백 여 명이나 2백명 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하건데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2021. 4. 27. [임진왜란46] 이순신을 죽이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feat. 조선 최고의 재상 이원익) 이번 영상은 아마도 고구마를 몇 개 먹는 느낌일 것이다... 미리 각오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왕은 도망자였고, 백성까지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까지 생각한 자였다. 그런데 자신보다 백성을 더 끔찍이 여겼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보다 더 백성들에게 신망을 더 받고 있는 장수가 등장했다(이순신).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왕 선조가 이순신에게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고, 무모한 출전명령을 장문포에서 왜선 2척을 격침시킨다. 그런데 이때부터 원균과의 사이가 노골적으로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선조실록 1594년 8월 21일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이 .. 2021. 4. 27. [임진왜란45] 조선군 단독 수륙양면작전 - 장문포 전투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왜 부산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일단 전염병으로 병력의 손실이 컸다. 아마도 6~7천으로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남쪽에 일본군 4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성을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선제공격 대신에 한산도를 지키고 있으면 더이상 일본이 한산도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선조는 조급했다. 이런 조급증의 선조를 부추긴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윤두수였다. 도체찰사 윤두수(1533~1601)가 선조에게 왜성을 선제공격하자는 건의를 강하게 한다. 유성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윤두수 편을 들었고, 선조는 육군과 수군이 연합해서 왜성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 2021. 4. 26. [임진왜란44] 이순신이 가장 두려웠던 순간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에 사실상 4년간의 휴전에 돌입하게 된다. 명나라의 입장에서 그동안 사대를 했던 조선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일단 자국의 영토에서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조선에 참전했던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일단 평양과 한양을 탈환했는데 그 와중에 일본군의 조총의 위력을 경험하고 되도록 더 이상 싸우는 것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말들이 역병에 걸리게 되어서 12,000필의 말이 죽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졸지에 요동 기병이 요동 보병으로 바뀐 것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도 역시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임난 초기에 한양까지는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지만 평양까지 점령한 이후에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양성을 후퇴한 이후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 2021. 4. 26. [임진왜란43]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의 2차 당항성 전투(feat.원균의 헛된 꿈) 임진왜란 시기 구분 1기 - 임진왜란 : 1592.4~1593.6 [부산성전투에서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2기 - 휴전기 : 1593.6~1597.7 3기 - 정유재란 : 1597.7~1598.11 [칠천량해전에서 노량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은 휴전기인 1593년 7월에 본영을 한산도로 옮긴다. (진주성이 일본의 손에 넘어간 후에 육지로 여수 본영이 공격당할 것이 우려되었나?) 난중일기에 보면 5월부터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었다. 이순신은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7월 2일. 맑다. 늦게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보았다. 선전관은 오후에 돌아갔다. 날이 저물녘에 김득룡이 와서 진양(진주)이 함락되었다고 전하며 “황명보, 최경회, 서예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이 죽었다”.. 2021. 4. 26. [임진왜란42] 진주성혈전-임난의 끝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 9만 7천명이 성을 공격했지만 8일째까지 막아낸 전투이다. 8일째 되는 날에 황진 장군이 시체더미에 숨어 있는 일본군 저격병에 의해 총알이 왼쪽 이마에 꽂히고 전사하게 된다. 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에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쏘았는데, 판순을 뚫고 진의 이마에 맞아 진이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이 여러 장수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 안에서는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021. 4. 25. [임진왜란41] 이것이 진짜 진주성전투다(황진vs일본 역사상 all of them) 진주대첩(5일 버팀) vs 2만(사상자 수 천) 행주대첩(12시간 버팀) vs 3만(사상자 천) 제2차 진주성 전투(9일 버팀) vs 10만(사상자 3만 8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6.22~6.29)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권율의 장계를 보니 왜적이 온갖 방법으로 진주를 공격하고 있는데, 명군은 아직까지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적과 대진하고 있는 의원으로는 오직, 선거이, 이천, 홍계남 뿐으로 그 형세가 매우 외롭고 약하다고 합니다. 권율의 생각은 다만 요해처를 지켜 호남을 보전하고자 할 뿐,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이니, 이런 뜻으로 급히 권율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40권.. 2021. 4. 25.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17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