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170 [임진왜란59] 이순신VS진린/왜군을 절여버린 절이도해전 [임진왜란59] 이순신VS진린/왜군을 절여버린 절이도해전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절에 하필이면 왕이 선조였고, 이순신의 옆에 원균 같은 선배가 있어서 상당히 고생했다. 그런데 이제 이순신은 또 다른 새로운 강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1543~1607)이라는 사람이었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서해바다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고화도에서 108일간 머물면서 판옥선을 40척 증강시킨다. 그리고 이듬해 고금도로 옮겨서 점차 조선의 수군을 증강시켜 나갔다. 이때 판옥선의 숫자를 80여 척까지 늘였다. 『이충무공행록』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강진에서 남쪽으로 30여 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산이 첩첩이 둘려 지세가 기이하고 또 그 곁에 농장이.. 2021. 5. 6. [임진왜란58] 반격의 서막-울산왜성 전투(feat.가토 개고생)15분순삭ver. [임진왜란58] 반격의 서막-울산왜성 전투(feat.가토 개고생)15분순삭ver. 이순신은 임진왜란 직후에는 지장의 모습, 조선수군이 궤멸된 이후에 명량해전에서는 용장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명량해전 이후에 조선수군을 완벽하게 부활시키는 과정에서는 덕장의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일본은 한때 천안까지 진격했지만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직산에서 구로다를 막아내고, 이순신에게 또 다시 수군이 털리면서 수륙병진작전이 좌절되면서 다시 후퇴하여 남해쪽의 왜성으로 들어간다. 이쯤 되면 자기들이 왜 정유재란을 일으켰는지 상당한 자괴감을 가질법도 했다. 당시 일본은 정유재란 때 많은 조선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간다.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피로인(被擄人)이라고 한다. 조명연합군은 다시 일본을 압박하려고 한다. 명나라에서.. 2021. 5. 6. [임진왜란57] 이순신의 제국, 건설되는가. 어라? 이쯤되면... [임진왜란57] 이순신의 제국, 건설되는가. 어라? 이쯤되면... 이번 영상에서는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의 수군이 부활하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패한 이후에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 좌군은 6만의 병력으로 웅천, 사천을 거쳐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남원성을 지키던 명나라의 양원이 도망치면서 남원성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도 도망쳐 버려서 일본은 전주까지 점령해렸다. 한편 가토가 중심이 된 우군은 8만의 병력으로 험난한 황석산성을 넘었다. 이때 함양군수 조종도(1537~1597), 안음현감 곽준(1550~1597)이 나름 분전했으나 전멸당하고,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서 많은 부녀자들이 ‘황석산성의 피.. 2021. 5. 4. [임진왜란56] 명량해전의 7대 의문점 해결 [임진왜란56] 명량해전의 7대 의문점 해결 1. 명량해전의 정확한 위치는? 전라우수영 앞바다는 잔잔한 바다였기 때문에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으로 올라타기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거리상으로 김억추의 배가 700미터 후퇴하여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수영 앞바다였다면 적이 양도를 돌아서 조선 수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적선은 정말 130척 이상이었다? 『난중일기』 이른 아침에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달려옵니다”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소대년고』 - 중국측 기록 순신은 우수영 명량 바다로 군사를 돌렸는데 날이 밝자 적선 五六.. 2021. 5. 3. [임진왜란55] 명 량 대 첩 (feat.초대와 만찬, 33분순삭ver.) [임진왜란55] 명 량 대 첩 (feat.초대와 만찬, 33분순삭ver.) 임진왜란의 주인공은 이순신일 수밖에 없다. 적대감을 갖고 임진왜란을 들여다 본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이순신에게 감탄한다. 이것은 중국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조선은 “육군은 우리가 더 강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일본은 “육군ㆍ수군 모두 우리가 더 강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지에서 조선의 육군은 신나게 털렸고, 조선의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판옥선을 수장시키고 튈 때까지만 해도 일본쪽에서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런데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패하면서 약간 놀라기 시작했다. 처음에 일본측에서는 자신들의 실수 혹은 방심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후 이순신에게.. 2021. 5. 3. [임진왜란54]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feat.어란포해전, 벽파진해전) [임진왜란54]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feat.어란포해전, 벽파진해전) 1597년 8월 3일 진주 손경례 가옥에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된다. 기록에 의하면 진주를 떠날 때 군관이 9명이고 병졸이 6명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전라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패잔병을 수습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 배설이 숨겨놓았던 12척의 판옥선을 찾고, 일본 수군이 서해바다로 올라가려고 할 때 싸워야 할 곳이 어딘지를 고민하는 조선수군 재건의 행보를 시작한다. 8월 4일에 이순신은 구례 현감 이원춘(?~1597)을 만난다. 이원춘은 후에 남원성으로 들어가서 남원성전투(1597.8.12~15)에서 일본군과 싸운다. 구례에서 조선 수군 출정식을 가진다. 8월 5일 곡성에서 이순신은 거북선 돌격대장 이기남(?~?)을 만난다.. 2021. 4. 30. [임진왜란53] 복직 후 달라진 이순신 - 선조 들이받다. [임진왜란53] 복직 후 달라진 이순신 - 선조 들이받다. 칠천량해전(1597.7.15~16)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일본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일본군은 처음으로 전라도로 진격해서 남원성을 점령(1597.8)했다. [칠천량해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 『난중일기 7월 18일』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하였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오전 10시께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어떻게도 의견을 정할 수가.. 2021. 4. 30. [임진왜란52] 남원성전투 [임진왜란52] 남원성전투 ‘임진왜란은 일본과 호남과의 대결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바다에서 일본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조선을 점령한 후에 호남을 지배할 예정이었던 일본의 고바야카와가 금산을 점령하고 전주로 진격하려고 할 때, 웅치(1592.7.7)와 이치(1592.7.8)에서 황진 장군(1550~1593)이 물리치면서 호남이 지켜졌다. 그리고 호남의 병사들이 권율과 함께 북상하여 독산성 전투(1592.12)에서 승리하고 행주대첩(1593.2)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이후 호남은 조선이 전쟁을 하는 기반이 되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배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호남이 지켜진 것은 호남 사람들이 열심히 싸운 것도 있지만,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 수.. 2021. 4. 29. [임진왜란51] 원균 은둔설? [임진왜란51] 원균 은둔설?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칠천량 해전(1597.7.15)의 주인공 원균... 이순신의 한산도의 승리보다 더 큰 패배를 안겨준 장수... 그는 과연 칠천량에서 죽었을까? 박정희가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우고 자신을 이순신과 등치시키려는 것은 솔직히 코메디라고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려운 가운데 권력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을 연개소문과 등치시키려 했다. 어찌보면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니 박정희는 차라리 연개소문을 존경한다고 했어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후 연개소문.. 2021. 4. 28. [임진왜란50] 칠 천 량 해 전 [임진왜란50] 칠 천 량 해 전 원균도 부산을 공격하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선조의 무리한 명령과 권율이 곤장까지 때리니까 패할 것을 알고 출전한 것이다? (이렇게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원균에게 출정을 강요하는 선조] 선조실록 1597년 7월 10일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대로 시행하라. 원균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침] 선조실록 1597년 7월 11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조정의 대신들 중에 나쁜 .. 2021. 4. 28.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17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