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7] 이순신의 제국, 건설되는가. 어라? 이쯤되면...
이번 영상에서는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의 수군이 부활하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패한 이후에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 좌군은 6만의 병력으로 웅천, 사천을 거쳐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남원성을 지키던 명나라의 양원이 도망치면서 남원성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도 도망쳐 버려서 일본은 전주까지 점령해렸다. 한편 가토가 중심이 된 우군은 8만의 병력으로 험난한 황석산성을 넘었다. 이때 함양군수 조종도(1537~1597), 안음현감 곽준(1550~1597)이 나름 분전했으나 전멸당하고,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서 많은 부녀자들이 ‘황석산성의 피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가토의 우군도 전주로 입성하였다.
이후 가토는 북상해서 공주를 점령하는 데 고니시는 부여로 향했다가 남쪽으로 내려온다. 아마도 남쪽 지역을 약탈하고, 서해바다로 북상하는 일본의 수군과 합류해서 함께 북상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가토와 구로다 병력은 천안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런데 천안 위의 직산에서 명나라 사령관 마귀(?~?)가 4천 기병과 구로다의 5천 보병이 서로 맞붙게 되었다(직산전투, 1597.9.7). 이때 명나라와 일본은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지만 상식적으로 명나라가 약간 조금 이긴 듯 하다. 결국 가토의 병력은 다시 공주로 내려왔다가 진천으로 올라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기다리던 일본의 수군이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막히면서 다시 한양을 점령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그래서 가토의 병력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울산왜성으로 들어갔고, 고니시의 부대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순천왜성에 머물게 된다. (당시 정유재란 때는 조선인들이 고을을 비우는 청야작전을 전개하고 산으로 숨어들었으며, 일본군은 조선인을 보는대로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결국 이순신이 명량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일본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된 것이다.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절을 하겠다는 선조] 『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
상이 말하기를,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조 입장에서는 이순신이 명량에서 승리한 것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 실록을 통해 구구절절 드러나고 있다. 어쩌면 선조는 이순신의 승리 보다는 자신이 불러들인 명나라의 군대가 직산에서 구로다의 북진하는 부대를 막았기 때문에 한양이 보존되었으며, 결국 명나라를 불러들인 자신의 공이 제일 크다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국의 왕이 다른 나라의 장수에게 절을 하겠다는 건 명나라 앞에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놓고 있는 선조의 모습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하루 뒤 암태도(조선시대는 ‘당사도’로 불림)로 후퇴한다. 그리고 서해바다를 거슬러 고군산도까지 올라간다. 아마도 일본군과 조선의 백성들에게 조선 수군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자신의 셋째 아들 이면(1577~1597)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충청도를 점령했던 일본군이 충남 아산을 공격하였고 이순신의 아들 이면이 전사한 것이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맑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열, 1571~?, 이순신의 차남)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밤 10시쯤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108일간 머물면서 완전히 수군을 부활시킨다. 13척의 판옥선에다가 40척의 판옥선을 추가시켰다. 40척의 판옥선을 추가시키려면 (판옥선 1척에 최소 100명이 타야했기 때문에) 최소 수군이 4,000명 이상 증강되어야 한다. 이때 이순신에게 가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백성들이 이순신에게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수군의 부활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수많은 인사들도 이순신을 찾아온다. 구례의 손인필 부자가 합류했고, 대장장이를 이끌고 대포와 함포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탠 곡성의 정사준(1553~?), 정사립(1564~?) 형제들도 이순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순신과 동명이인인 무의공 이순신(1553~1611)도 이순신을 찾아왔다. 후에 이순신의 참모 역할을 한 이의온(1577~1645)도 찾아왔는데, 그는 이황의 스승급으로 알려진 이언적(1491~1553)의 손자였다.
어느정도 수군을 회복한 이순신은 고하도를 떠나 완도 옆에 있는 고금도로 이동한다. 고금도는 당시에 1,500여 호가 살고 있는 섬이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둔전(屯田, 군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토지)을 경작하게 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수군 병력은 8,000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의온의 아이디어로 주변에 바다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발급하여 그들이 제공하는 군량미를 모아서 1만섬의 군량미를 비축하게 된다. 그리고 판옥선을 30척 추가시켰다.
당시 고금도를 다녀온 이덕형(한음, 1561~1613)은 이런 장계를 올렸다.
[고금도까지 와서 이순신을 만나고 간 이덕형의 장계]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이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 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데 그가 고금도로 들어가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더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이곳 고금도로 명나라 함대가 합류하게 되는데 당시 명나라 해군 제독은 성질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진린(1543~1607)이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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