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9] 이순신VS진린/왜군을 절여버린 절이도해전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절에 하필이면 왕이 선조였고, 이순신의 옆에 원균 같은 선배가 있어서 상당히 고생했다. 그런데 이제 이순신은 또 다른 새로운 강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1543~1607)이라는 사람이었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서해바다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고화도에서 108일간 머물면서 판옥선을 40척 증강시킨다. 그리고 이듬해 고금도로 옮겨서 점차 조선의 수군을 증강시켜 나갔다. 이때 판옥선의 숫자를 80여 척까지 늘였다.
『이충무공행록』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강진에서 남쪽으로 30여 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산이 첩첩이 둘려 지세가 기이하고 또 그 곁에 농장이 있이서 아주 편리하므로, 공은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거기서 군량 공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군대의 위세가 이미 강성해져서 남도 백성들이 공을 의지해 사는 자들이 수 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10배나 더하였다.
1598년 5월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한양으로 들어왔다. 진린은 조선의 왕 선조에게 ‘조선의 장수들 중에 군율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내가 혼쭐을 내주겠다!’라고 선언하였고, 명나라 군대의 군량미를 제대로 조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조선의 관리(6품)의 목에 밧줄을 걸고 말로 끌고 다닐 정도로 양아치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나름 명나라에서 많은 군공을 세운 인물이었는데 성질이 더러워서(탐욕스럽고 포악스러워서) 자주 탄핵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래도 전투에서의 지휘 능력은 나름 인정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에 대한 류성룡의 평가가 징비록에 등장한다.
『징비록』
얼마 후 명나라 수병도독 진린이 고금도로 내려와 이순신과 합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고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모두 그를 꺼려했다. 그가 출발할 때 임금께서는 청파 들판까지 나와 몸소 전송하였다.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며 욕하며, 찰방 이상규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를 만드는 모습을 본 나는 통역관에게 그를 풀어주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여러 대신에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패할 것 같소이다. 진린은 장수의 권한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고, 군사들 또한 제 마음대로 다룰 것이니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소?” 모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도 조정을 통해서 진린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개차반이고 갑질 넘버원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나름 이전의 경험(원균)을 통해서 진린의 마음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한 듯 하다. 1598년 7월에 고금도로 진린이 내려왔을 때, 이순신은 진린과 진린과 함께 온 등자룡(1531~1598)을 비롯한 5천여 명의 명나라 수군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진린은 일단 이순신에게 호감을 갖는다.
이때 일본 수군도 명나라 수군 제독이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명 지휘체계의 불협화음이 있을지도 몰라서 일단 찔러보기로 한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도도 다카토라(1556~1630), 가토 요시아키(1563~1631) 등이 100여 척의 함대와 만 6천여 명을 데리고 고금도로 쳐들어온다. 이때 이순신은 진린에게 의사를 물어본다. 명나라가 단독으로 싸울 것인지, 조선수군과 함께 싸울 것인지, 먼 길을 오는 데 피곤할 터이니 조선 수군이 싸울테니 구경할 것인지... 진린은 세 번째를 선택하고 구경하기로 한다.
이순신은 하루 전에 금당도로 간다. 그리고 조선의 수군을 고흥반도 서쪽에 수군을 매복시켜놓았다. 일본군은 결과적으로 거금도를 돌아서 소록도 쪽으로 들어왔다. 일본 수군이 소록도를 지나는 순간, 조선 수군이 위 아래에서 에워싸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 수군은 아무 것도 못하고 50척의 함대가 격침이 되었고, 최소 몇 천명이 바다에 빠져 물고기밥이 되었다. 이때 절이도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의 수급을 베어 모았다.
금당도에서 이 싸움을 지켜보던 진린은 안절부절한다. ‘이 승리를 내가 이루었어야 하고, 이 승리를 황제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아깝다’고 생각하는 진린에게 이순신이 수급 40여 개를 선물로 바친다.
이순신은 이때 장계를 두 개 올려보낸다. 하나는 진린이 공을 빼앗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린이 열심히 싸웠다는 것이다. 이 싸움에 대해서 진린이 이순신의 승전을 가로챘다는 소문이 돌아서 명나라 감찰관이 조사하러 내려오기도 했다. 진린이 코너에 몰린 것이다. 이때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올린 두 번째 장계(진린이 열심히 싸웠다)를 명나라에게 보내서 진린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이후 진린은 이순신을 작은 나라의 하찮은 장수가 아니라 전우, 동료로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 이순신은 판옥선 1척을 진린에게 선물로 준다.
명나라는 정화의 대원정 이후에 바닷길을 막아서 해군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일본의 안택선은 가볍고 약한 반면, 빠르기라도 하지만 명나라의 사선과 호선은 빠르지도 않고 많이 타봐야 80명 정도 타는 배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판옥선을 선물로 받은 진린은 엄청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진린은 이순신을 제대로 대접했다. 항상 같이 걸었고 자신의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를 앞서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신이 이순신보다 두 살 많았지만 중국에서 존칭으로 표현하는 ‘야’(爺)를 사용해서 이순신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린이 선조에게 올리는 글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습니다.”
선조에게는 차라리 올리지 말았어야 하는 글이었다. 쫌생이 선조가 이 글을 읽고 느꼈을 이순신에 대한 질투심은 안봐도 비디오다.
진린이 명나라 만력제에게 이순신의 등용을 요청하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으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 청)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 척만이 남았으며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 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 분명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 폐하께 충(忠)을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캐를 견제케 하소서.”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한다. 진린이 보기에 이순신은 자국 명나라의 군대 통수권을 줘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의 수군도독직을 제수받았다는 소문은 분명히 있었고 이는 선조를 당황케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진린이 충분히 이순신 추천서를 썼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시한 진린의 이순신 추천서는 일본 역사서에서 발췌되어 많이 돌아다니는 내용이고 완도신문 등에서 기사로 나온 내용이긴 합니다만 원문은 확인되지 않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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