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8] 반격의 서막-울산왜성 전투(feat.가토 개고생)15분순삭ver.
이순신은 임진왜란 직후에는 지장의 모습, 조선수군이 궤멸된 이후에 명량해전에서는 용장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명량해전 이후에 조선수군을 완벽하게 부활시키는 과정에서는 덕장의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일본은 한때 천안까지 진격했지만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직산에서 구로다를 막아내고, 이순신에게 또 다시 수군이 털리면서 수륙병진작전이 좌절되면서 다시 후퇴하여 남해쪽의 왜성으로 들어간다. 이쯤 되면 자기들이 왜 정유재란을 일으켰는지 상당한 자괴감을 가질법도 했다. 당시 일본은 정유재란 때 많은 조선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간다.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피로인(被擄人)이라고 한다.
조명연합군은 다시 일본을 압박하려고 한다. 명나라에서 증원군이 와서 약 4만의 병력으로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만력제가 계속 병력을 보내서 나중에는 13만까지 증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왜성 하나를 공격해서 취하려고 한다.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로 압축이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토의 울산왜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5만여 명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으로 향한다. (부산왜성은 일본군의 전진기기 역할을 하고 있었고, 서생포왜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만든 왜성으로 울산왜성 역시 가토가 만든 성이다)
명나라 병력 4만 총사령관은 경리 양호(?~1629), 마귀(?~?), 해생(?~?)이 출동하였고, 조선군은 1만명으로 권율, 정기룡(1562~1622), 고언백(?~1609), 이운룡(1562~1610)이 합세하여 총 5만의 조명연합군이 전진기지를 경주로 삼고 울산성을 공략하려고 한다.
울산왜성 전투는 1597년 12월 23일에 공격을 시작해서 1598년 1월 4일까지 진행된 전투이다. 울산왜성은 일본군 1만 5천 정도가 지키고 있었다. (원래 가토는 서생포왜성에 있었는데 울산왜성을 지키기 위해 입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성이 막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 축조하는 공병대까지 합하면 약 2만의 병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주 방어 병력이 1만 5천으로 생각해보면, 대부분 공성전의 경우 방어하는 병력보다 세 배의 병력이면 함락이 가능하다고 하기 때문에 5만의 조명연합군으로서는 해볼만한 전투였다고 한다.
초기에는 일본군이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첫째날과 둘째날인 12월 24일에 성이 점령 직전까지 간다. 이때 명나라 군사들 중에서 절강성에서 온 남병들이 왜성을 기어올라 점령 직전까지 도달했다. 수비하는 왜군의 목만 660개를 베었다고 하면 성에 기어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총사령관 경리 양호는 북방 기병과 친한 사람이었기에 갑자기 퇴각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울산왜성은 함락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남병보다는 요동 기병에게 공을 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셋째 날인 12월 25일부터는 일본군의 방어가 만만치 않았다. 명나라 사상자들이 꽤 생겼다. 26일에는 조선군이 공격했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가 된다. 이후 명나라와 조선은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울산왜성이 만들어진 지 얼마 안되는 성이기 때문에 우물이 없을 것이고 식량도 부족할 것이니 성을 포위하고 고사시켜버리기로 작정한 것디다.
울산왜성의 일본군들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결사대를 조직해서 태화강의 물을 뜨려고 했으나 매복해 있던 조명연합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성안에서는 물이 부족해서 말을 죽여서 말을 피까지 마셨다고 한다. 가토는 할복하려고 두 번이나 준비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때, 하늘이 일본의 편이 되어 한겨울에 ‘겨울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울산왜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자신들의 성이 공격목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각 왜성의 수장들이 구원병을 보냈다. 울산왜성 포위작전을 하면서 나름 조명연합군도 지쳐있어서 결국 포위망을 풀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는 어느 쪽도 승리하지 않은 전투가 되었지만, 우리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전투로 남게 되었다. 양쪽의 사상자가 1만여 명이 나온 전투였다.
후에 가토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구마모토 성을 만들었는데 울산왜성의 경험 때문에 우물만 120개를 팠으며, 토란줄기로 (혹시나 굶주림에 대한 방비로) 다다미를 만들었다고 하며, 외출할 때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울산중구청에서 울산왜성을 복원하면서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을 건립하려는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가 울산 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토착왜구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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