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6] 명량해전의 7대 의문점 해결
본문 바로가기
[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56] 명량해전의 7대 의문점 해결

by [수호천사] 2021. 5. 3.
반응형

[임진왜란56] 명량해전의 7대 의문점 해결

 

 

 

 

1. 명량해전의 정확한 위치는?

 

전라우수영 앞바다는 잔잔한 바다였기 때문에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으로 올라타기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거리상으로 김억추의 배가 700미터 후퇴하여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수영 앞바다였다면 적이 양도를 돌아서 조선 수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적선은 정말 130척 이상이었다?

 

『난중일기』
이른 아침에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달려옵니다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소대년고』 - 중국측 기록
순신은 우수영 명량 바다로 군사를 돌렸는데 날이 밝자 적선 五六百 이 바다를 뒤덮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이순신이 군사를 돌려서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적선 5, 6백척이 바다를 가리우고 왔다. 적의 장수 마다시(구루지마 미치후사)는 본래 수전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3. 일본도 패배를 인정하는가?

 

고산공실록, 일본전사조선역, 이순신과 히데요시

큰 강의 여울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인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1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꼭 쳐부숴야겠다고 수군들도 상의하여 싸우게 된 것입니다. 큰 배로는 지금의 좁은 해역을 배를 저어나갈 수 없으므로, 모두 세키부네를 마련한 후에 싸움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먼저 싸움을 시작한 수군들은 적선을 만나,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습니다. 그 중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님은 전사하셨습니다. 그 밖에 수군들이 잡혀갔습니다. 부하들도 과반수는 잡혀가거나 전사하든가 했습니다. 그곳에서 모리 타카마사님이 세키부네를 타고 적선을 공격했습니다. 적선으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십자 모양의 낫은 걸었습니다만, 적선으로부터 활과 총탄이 격렬하게 퍼부었으므로 배를 떠나 바다로 들어가 위험하게 되었는데, ‘도도 송하치로도도 다카요시두 사람의 배가 다가와서 적선들을 밀어제친 후 구해드렸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싸웠습니다. ‘도도 다카토라님도 팔 두 곳을 부상당했습니다.

 

4.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리에 대한 선조의 반응

 

명나라 경리 양호(?~1629)가 이순신에게 명량에서의 노고를 치하하며 비단과 은자를 보내자 선조가 경리에게 하는 말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으로 상 주고 표창하여 가상이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승리가 기뻤을까? 이순신이 뚫리면 또다시 한양까지 뚫린다는 걸 알면 기뻤겠지만, 그동안 선조의 행동거지로 살펴본다면, 이순신이 승리한 것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5. 명량해전 당시 철쇄 사슬을 사용하였나?

 

20세기 초반 현무공실기,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로 적선을 깨뜨렸다.”

 

18세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처음 철쇄를 언급하고 있는데, 지역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것이다. 진도 사람들은 나름 철쇄를 사용해서 당시 전투에 도움을 주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무공실기는 김억추의 후손들이 쓴 책으로 당시 전투에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나름 공을 세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당시에 조선은 철이 부족했다. 철이 있다면 먼저 병장기를 만드는 데 사용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철쇄는 오늘날 포항제철에 가야만 만들 수 있는 쇠사슬이다. 그리고 물살이 센 지역에서 일본의 배들이 난파되어 떠밀려 내려오는데 철쇄를 사람들이 돌려서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6. 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출정하였나?

 

이분(1566~1619, 이순신의 조카)이 기록한 행록에는 거북선이 명량해전에 등장했다고 나온다.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병선을 수습하게 하고 또 장수들에게 명하여 거북선을 꾸며 만들에 군세를 돋구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분은 실제 명량 전투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칠천량 패전(1597.7.16) 이후 두 달 만에 명량해전 승리(1597.9.16)가 있었기 때문에 거북선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7. 명량해전 주민 참전or관전? 강강수월래 가능하였나?

 

주민들의 배는 멀리서 보기에 전선으로 오인할 수 있는 허장성세의 기능을 했다. 그리고 주민들은 주변의 육지 언덕에서 바다의 전투를 애타는 마음으로 관전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가족의 생명이 걸린 전투인데 도중에 춤을 추는 건 조금... 전투 후에 춤을 추는 것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728x90
반응형

댓글


TOP

TEL. 02.1234.5678 /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