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5] 명 량 대 첩 (feat.초대와 만찬, 33분순삭ver.)
임진왜란의 주인공은 이순신일 수밖에 없다. 적대감을 갖고 임진왜란을 들여다 본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이순신에게 감탄한다. 이것은 중국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조선은 “육군은 우리가 더 강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일본은 “육군ㆍ수군 모두 우리가 더 강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지에서 조선의 육군은 신나게 털렸고, 조선의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판옥선을 수장시키고 튈 때까지만 해도 일본쪽에서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런데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패하면서 약간 놀라기 시작했다. 처음에 일본측에서는 자신들의 실수 혹은 방심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후 이순신에게 계속 패하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공포감이 생겼고 ‘조선수군과 교전을 금하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떨어지게 된다.
1592년 임진년에 이순신의 거듭되는 승리,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본영을 한산도로 옮긴 이후에 일본은 한산도 서쪽으로는 단 한 척의 배도 보내지 못한다. 바다에서 이순신은 호남을 지켰고,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막아낸 것이다.
이후 이순신이 파직되면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깨끗하게 말아먹었다. 그런데 솔직히 칠천량은 일본에게는 준비되지 않은 승리였다. 일본이 잘한 전투가 아니라 원균 스스로 알아서 조선의 수군을 궤멸시킨 전투였다. 이후 일본군은 천천히 남해바다로 진격해서 (그 일본 수군의 느린 속도 때문에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정비할 수 있었다)
명량해전 이전에 일본 수군은 어란진을 전진기지로 삼았고,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일본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벽파진 옆의 울돌목(명량, 鳴梁)으로 일본 수군이 들어와야 했다. 만약 진도를 크게 돌아서 서해바다로 올라가게 되면 낭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수군이 다른 곳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벽파진 앞에 판옥선을 정박해 놓았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과 같은 등급으로는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경상우수사 배설이 있었다. 배설은 9월 2일에 탈영해서 도망쳐 버렸다(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에서 참수당함). 그리고 김억추를 전라우수사에 앉힌 인물은 원균과 함께 이순신 모함의 선봉장이었던 김응남(1546~1598)이었다. 여러모로 이순신 주변에는 도움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
일본군이 어란진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9월 15일에 탐망꾼 임준영(?~?)이 내일 전투가 개시될 것이라고 알려왔다. 그제서야 이순신은 판옥선을 이끌고 본영으로 갔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능히 길목에서 한 명이 천명을 막아낼 수 있다.”
“내일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군법을 제대로 적용할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자신들의 유리함을 직감한 일본 수군은 서로 선봉에 서려고 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서 조선의 이순신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새로운 선봉장을 보냈다. 그는 바로 구루지마 미치후사(1562~1597)라는 인물인데, 그는 자신의 형이 당항포에서 이순신에게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군장은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혼났던 와키자카 야스라후, 총사령관은 사천에서 이순신에게 혼났던 도도 다카토라(1556~1630)였다.
이순신은 당시 일자진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김억추는 일자진에서 700미터 뒤에 물러나 있었다. (축구로 따지면 골키퍼?) 일본군이 다가올 때 이순신의 판옥선이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나머지 판옥선들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순신의 배가 상대방 일본의 배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이순신은 적이 판옥선에 올라타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실제로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에 올라타기는 쉽지 않은 높이였다. 사다리를 이용해서 올라타야 하는데 물살이 강해서 배가 흔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일본 수군이 상당히 많았다.
한참을 이순신이 혼자서 일본 수군을 상대하고 있을 때,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1554~?)의 배가 이순신을 도우러 앞으로 나왔다. 이제 세 척이 된 조선의 수군이 일본의 수군과 싸우게 되었다. 도중에 안위의 배가 왜선들에게 둘러싸였지만 김응함과 이순신의 배가 안위의 배를 구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살이 변해서 조선군에게서 일본군쪽으로 물살이 바뀌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파손된 배들이 밀려오는 것을 피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과 안위, 김응함의 판옥선이 일본 수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미 와키자카와 도도 다카토라는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승전을 자세히 보고하라고 보낸 중앙 감찰관 모리 다카마사(1559~1628)은 바다에 빠졌다가 간신히 도망쳤다. 이순신의 배에 타 있던 항왜장수 준사(?~?)가 기절해서 바다에 빠져있는 구루지마를 발견했고, 이순신은 구루지마를 건져올려 목을 잘라 버렸다.
명량해전에서는 이순신의 배 1척이 싸움을 시작했고 도중에 김응함과 안위의 도움을 받아 왜선 31척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당시 일본의 육군은 남원성 전주성을 점령하고 천안으로 진격했을 때, 명나라의 제독 마귀(1543~1607)가 거느린 4천 명과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의 5천 병력이 붙었다가(직산전투, 1597.9.7) 구로다가 후퇴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이 빨리 서해바다로 올라가서 마귀의 부대를 협공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순신의 판옥선 한척에 의해 막혀버린 것이다.
명량 이전까지는 영웅이었던 이순신은 명량 이후에는 성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선조가 칠천량에서 원균이 패한 것을 ‘천운’이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명량의 해전에서의 승리를 ‘천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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