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항복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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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6일 동안의 광복] 항복방송

by [수호천사]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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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항복방송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강제 폐간... 19408...

기자들이 호구를 위해 매일신보에 입사... 매신의 당사자인 조용만(1909-1995)당시 매일신보 사원들은 그야말로 매신해온 사람들이어서 하루 신문지면을 만들어 채우면 그만이지 신문을 잘 만들어 보겠다는 열의도, 정성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107)

 

언론인 유광렬이 1947년 특별고등경찰로 근무했던 이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인 지식인 약 2만 명을 학살할 계획으로 명단을 작성했다. 시기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직후로, 적군의 눈앞에서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명단을 작성한 것은 경찰이었고 실행주체는 헌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계획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112)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4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115)

 

천황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들렸다 해도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는 두루뭉술한 표현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의미를 연결할 수 있는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116-117)

 

일본의 패전은 확정됐다. 엔도 정무총감은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지는 듯한 고립감을 느꼈다. 그는 일본 내무성에 정전의 대칙을 확인했다. 조선 내의 제반 정세에 대해 중앙으로부터 어떤 지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전신을 보냈다. 앞으로 조선총독부가 어떻게 이 난국을 해쳐가야 할지에 대해 중앙정부의 훈령을 요청한 것이다. 엔도는 눈이 빠지게 회신을 기다렸을테지만 도쿄 내무성에선 아무 응답도 전해오지 않았다. (120-121)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 사회에서 최고 유력자 가운데 하나인 호즈미 신로쿠로(1889-1970) 경선전기 사장은 이쿠타 기요사부로 경기도지사실에서 방송을 들었다... (122)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역시 조선인들처럼 중요 정보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돼 있었다... 호즈미 같은 일본인 유력자보다 몰래 단파방송을 청취하며 전쟁 추이를 살피던 조선인 쪽이 더 정확히 정세를 꿰뚫는 형편이었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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