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소련군이 내려온다 – 총독부의 8ㆍ15
‘가야마 가에이’란 창씨명으로 조선총독부 총독관방 조사과장을 맡고 있던 최하영(1908~1978)... 1945년 1월 14일의 ‘기묘한 회의’에 대한 증언
에타가키 세시로(1885-1948) 조선군 사령관... “우리쪽 해군이 거꾸로 전멸 당했습니다...”
최하영은 1968년 월간중앙 8월호에 회의 광경을 생생히 묘사했다. 당시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인은 최하영과 엄창섭(다케나가 가즈키) 학무국장 뿐이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들었던 일본의 패전 예고”였다. (53-54)
최하영은 엔도 정무총감이 자신을 불러낸 날을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의사를 전한 바로 다음날인 11일이라고 기억했다...
니시히로 경무국장은... 조선인에게 통치권을 어느 정도 이양한다면 누구에게 하는 게 좋은지 직접 교섭의 중간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잠시 당황하던 최하영은 자신의 도쿄제대 선배인 박석윤(1898-1950)을 추천했다. 3ㆍ1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육당 최남선의 매제였던 박석윤은 도쿄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매일신보〉 부사장을 거쳐 만주국 폴란드대사를 지낸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1932년 말부터 1935년까지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에 궤멸적 타격을 입히게 되는 ‘민생단 사건’의 씨앗이 된 ‘민생단’의 조직자이기도 했다. 여운형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 서기국에서 활동했던 이동화는 박석윤에 대해 “소위 친일파 거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일제 말기에는 자기 과거에 대한 일종의 속죄의식을 가지고 조국과 겨레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박석윤 본인도 해방 무렵 여운형에게 “나는 친일파로서 어떤 처벌을 받는대도 감수할 생각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여기가 내 조국이며, 내 고향”이라는 고백을 남겼다. (56-58)
일본 정부는 10일 항복의사를 밝혔지만 ‘천황의 지위’를 분명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군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나흘이나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는 사이 소련의 본격적인 조선 상륙이 시작됐다. 소련은 9일 자정을 기해 나진과 웅기 등을 침범한 뒤, 13일 오전 10시 30분께 한반도 북동부 주요 항구인 청진항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련군이 일본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청진을 점령한 것은 16일... 전투행위가 완전히 끝난 것은 19일 저녁 무렵이었다...
총독부 수뇌부는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이 기차를 타고 남하한다면 ‘빠르면 20시간’ 안에 경성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소련군이 경성에 입성하면 서대문 형무소 등에 수감돼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석방해 조선에 공산정권을 수립할 것이 불보듯 뻔했다.
조선 치안의 총책임자인 니시히로는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 했다.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길은 적극적인 선제대응뿐이었다. 일본의 패전이 확인 되는대로 형무소에 갇혀 있는 조선의 정치범과 사상범을 석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조선인 유력자에게 치안 협조를 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니시히로가 교섭대상으로 머리에 떠올린 인물은 여형, 안재옹, 송진우 등 3명이었다. (58-59)
8월 14일 밤... 일본의 국책 통신사였던 〈도에이 통신〉 경성지국은 이날 밤 11시께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최종 수락하며 무조건 항복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대세가 정해졌으니, 준비했던 대책을 실행해야 했다. 니시히로는 곧바로 엔도가 머물고 있는 정무총감 관저를 찾아가 “사태 수습을 위해 조선 각 형무소에 갇힌 정치범, 사상범을 석방하고, 조선인의 손으로 치안유지를 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엔도는 동의했다. 그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는 26년 전 3ㆍ1운동의 열기를 현장에서 목격한 인물이었다. 조선 민중들이 분노할 경우 얼마나 무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70여 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에 치명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조선인의 유혈 폭동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59-60)
엔도는 나가사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련군이 경성에 진입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총독부가 선택한 인물은 여운형이었다... 엔도는 1957년 8월 일본 언론 〈국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여운형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당시 조선 민중 사이에 명망도 높고, 과거 독립운동의 경력으로도, 그리고 나와 깊은 우정의 연도 있고 내가 평소 씨의(그들의)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점”을 꼽았다. 엔도가 언급한 ‘깊은 우정의 연’이란 그가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뒤 여운형을 대중평화공작에 활용하기 위해 여러 협의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62)
엔도는 7월에도 여운형을 불러 조선의 치안문제와 학생들의 사상격화에 대한 대책을 물으며 협조를 부탁했다. 여운형이 학생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조언하자, 엔도는 “이 말이 세간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 그대의 말대로 실행해볼까 생각이 있는데, 그대의 말을 듣고 행하였다 하면 내게나 그대에게나 유익한 바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운형은 엔도의 요청에 따라 방위ㆍ치안ㆍ사상ㆍ식량에 대한 짧은 논문을 써준 일이 있었다. 이후 여운형의 조언대로 일부 학생들은 석방되고 일부 학생들은 경한 처벌을 받았다. 이같은 사실을 기초로 강덕상은 “대중평화교섭을 위한 협의를 거듭하며 쌓인 (둘 사이의) 개인적인 신뢰관계”가 엔도가 여운형을 선택하게 된 핵심 이유라고 지적했다. (63)
모리타 요시오 〈조선 종전의 기록〉... 여운형이 오전 6시 30분께 나가사키 소장, 백윤화 경성지방법원 판사와 함께 야마토정(현재 충무로)의 총감 관저를 방문했다고 기술돼 있다. 나가사키는 요시찰 인물인 여운형의 동태를 파악해야 하는 책임자였고, 백윤화는 일본어에 서툰 여운형을 돕기 위한 통역이었다. (64)
모리사 요시오는 191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뒤, 약재상을 하던 아버지와 함께 조선으로 이주했다. 군산공립소학교, 경성중학교를 거쳐, 1937년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조선사를 전공했다. 종전후 외무성에서 근무한 모리타는 퇴임후 1975-1977년까지 성신여자사범대학(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것에 대해 8월 16일 한국인들이 ‘만세, 만세’라고 해방을 기버하고 자축하는 모습을 보며 깊이 반성했기 때문이라는 증언을 남겼다. 1992년 심부전으로 타계했을 때 성신여대 제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스승의 노래〉를 부르며 그를 애도했다. (64)
회담 현장에 있었던 이는 여운형, 엔도, 백윤화, 나가사키, 니시히로... (65)
여운형이 계동으로 돌아온 것은 아침 8시 50분께... 산전수전을 겪은 노장 공산주의자로 꾀가 많아 공산운동계의 조조라 불리던 정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백은 1922년 〈신생활〉 잡지를 통해 등장한 뒤, 1923년 김사국, 이영 등과 함께 서울 청년회 간부로 활동했고, 1924년 11월 서울계 공산당에 참여해 총 6년 4개월을 복역한 서울파에 속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9일 지면에서 그가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펼친 죄로 전주 형무소에서 3년 복역을 마친 뒤 출감해 고향인 강원도 금화로 떠났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해방 무렵까지 광산업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백은 이 무렵 같은 계동에 위치한 공산주의자 장일환(1898-?)의 집에 묶고 있었다. 여운형이 엔도를 만난 직후 귀가하며 정백을 데리고 들어와 무언가를 논의했다는 것은 해방 직후 정계를 주도하게 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진로를 예상케하는 의미심장한 움직임이었다. (66-67)
정백은 그해 봄부터 여운형, 안재홍 등이 추진했던 민족대회 소집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백에 따르면 “여운형, 안재홍은 8월 12일 석방된 정백과 함께 협의하고, 독립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수립”을 준비했다. 여기서 정백이 맡은 일은 “동아일보파의 송진우”와 협력의 필요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이 증언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작업이 건국동맹 등 측근의 범위를 넘어 비타협 민족주의자(안재홍), 공산주의자(정백), 자본가의 이해를 반영하는 개량적 민족주의자(송진우) 등 좌우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범위에서 진행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운형과 그 측근들이 중심인 좌파였다. (67)
여운형이 언급한 ‘정세의 변화’란 경성에 미군이 아닌 소련군이 진주할 것이란 엔도의 예측이었다... 실제 소련군이 이미 한반도에 진입했다는 것은 〈매일신보〉도 보도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소련이 경성을 점령하리라는 엔도의 합리적이지만 섣부른 예측은 이후 해방정국에 엄청난 연쇄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68)
여운홍은 1969년 12월 21일 이정식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본디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양반이 더군다나 소련군이 여기 들어온다니까 정백이를 우선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한다고 그런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69)
여운형이 젊은 시절 모스크바를 방문해 체험한 소련은 피지배민족을 배려하는 따뜻한 인터네셔널리즘의 나라였다... 레닌은 1920년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200만 루블을 무상원조하기로 결정하고, 그 1차분인 40만루블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스크바 전권대사이자 한인사회당원인 한형권에게 순금으로 지급했다... 현재 화폐로 환산하면 510억원... 여운형은 1922년 1월 22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해 레닌과 만나게 된다. 레닌은 그를 따뜻하게 맞으며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지금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는 견해를 밝혔다. 여운형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신중하고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1945년의 소련은 바늘은커녕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차가운 스탈린이 통치하고 있었다. (69-70)
일본이 항복을 결심한 두 가지 변수... 1) 원자폭탄의 위력... 2) 소련의 참전...
9일 오전 10시 반 일본의 운명을 정하기 위한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렸다. 스즈키는 “히로시마와 소련 참전이라는 주변 정세를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전쟁 계속은 불가능하다”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 전쟁을 종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냉정한 현실론자인 요나미 미쓰마사 해군상도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우리가 희망조건을 제시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며 단숨에 항복 수락쪽으로 논의의 물꼬를 텄다.
남은 문제는 ‘항복의 조건’이었다.
스즈키 총리, 도고 외상, 요나미 해군상 등 강화파는 ‘황실 유지’ 즉 천황제라는 국체를 지키는 조건 단 하나만 걸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아나미 고레치가 육군상,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 도요타 소메우 군령부장(해군참모총장)은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1) 점령은 소범위, 소병력으로 실시, 2) 무장해제는 일본 자율적으로 진행, 3) 전쟁범죄자도 일본 스스로 처분이란 세 개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고 맞섰다. 특히 육군을 대표하는 아나미 육군상이 강경 의견을 쏟아냈다. 도고의 1개 조건론과 아나미의 4개 조건론이 격렬히 대립한 것이다.
회의 막바지,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였다.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채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각료회의가 소집됐고, 밤 10시까지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히로이토 천황은... “외무대신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각의를 마친 도고는 급히 외무성으로 돌아왔다. 눈이 빠지게 도고를 기다리던 마쓰모토 슌이치 차관에게 “천황의 지위를 변경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각의 결정사항을 전달했다. 일본은 중립국인 스위스ㆍ스웨덴을 통해 일본 정부의 항복의사를 전했다. 외무성이 “제국정부는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있었던 미ㆍ영ㆍ중 3국 정상에 의해 발표됐고 이후 소련 정부가 참가한 공동선언에 나온 조건을 이 선언이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에 대한 변경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이해 아래 수락한다”는 전문을 타전한 것은 10일 오전 6시 45분이었다. (71-73)
일본이 10일 연합국에 전달한 것은 “천황의 국가 통치 대권에 대한 변경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조건부 항복’의사였다... 천황제를 유지하게 해달라는 일본의 요구에 대한 미국의 응답은 “(항복뒤)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제한 아래’(be subject to) 놓이게 된다. 일본 정부의 최종적인 형태는 포츠담 선언에 부합하도록 일본 국민들의 자유롭게 표명된 의사에 의해 수립될 것”이었다. 일본 정부가 절실히 확인하고 싶어하는 ‘천황제 유지’ 여부에 대해선 명확히 답하지 않은 회신이었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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