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경거망동을 삼가라 – 송진우의 8ㆍ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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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6일 동안의 광복] 경거망동을 삼가라 – 송진우의 8ㆍ15

by [수호천사]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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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경거망동을 삼가라 – 송진우의 8ㆍ15

 

19225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사회부장편집국장 등 요직을 거친 설의식(1900-1954)이 처남을 통해 단파 라디오를 입수한 것은 1944년 늦은 가을이었다... 19368월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고 있던 설의식은 사건에 책임을 지고 퇴사한 뒤, 해방무렵엔 광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810일 평소 친분이 있던 아사히 신문경성지국장 이슈인 가네오와 만났다. 이슈인은 뜻밖의 경고를 했다. “불일 내로 대량의 예비검속이 시작될 터이니 그대도 주의하라.”

이슈인의 경고를 들은 설의식은 전쟁이 최후의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직감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10일 밤 단파 라디오의 스위치를 켠다... 방송은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의사를 전했다는 사실과 거기에 연합국이 어떻게 답했는지 등을 명쾌한 일본말로 전하고 있었다...

11일 아침 6. 구한말 지사였던 부친 설태희의 초상 앞에 조선이 해방된다는 사실을 고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동아일보의 사주인 김성수(1891-1955)와 송진우에게 전하기로 했다. (79-81)

 

19408.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 송진우는 외부 활동을 피한 채 원서동 자택에 칩거했다. 우파 민족주의 인사 대부분이 1930년대말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 사건을 겪은 뒤 전향해 몸을 더럽혔지만, 송진우 만큼은 이불을 쓰고 누워 총독부의 온갖 요구를 일체 거절했다. (83-84)

 

전남 영암 출신인 김준연은 1917년 경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카야마의 제6고를 거쳐 1920년 도쿄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당대의 엘리트였다. 이후 1922-1924년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곧바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김준연이 새로 귀국해 행장도 끄르기 전에 다시 머나먼 모스크바로 떠나게 만들었다. 1925년 소일기본조약 체결로 양국간에 국교가 회복되자 소련이라는 미지의 나라를 조선에 소개하기 위한 모스크바 단기 특파원에 임명한 것이다. 김준연은 4월초 러시아에 도착한 뒤 520일 모스크바를 떠나 6월 초에 귀국했다. 그는 이때 취재 내용을 조선일보50회나 연재했다. 송진우가 이 서른 세 살의 엘리트를 동아일보편집국장으로 스카웃 한 것은 2년 뒤인 192710월이었다. 이 무렵 김준연은 3차 조선공산당의 최고책임자인 책임비서직을 맡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던 총독부가 송진우를 불러 김준연을 채용한 경위를 물었다. 송진우는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학문과 덕망이 있고, 신사상을 이해하는 좋은 사람이어서 썼다고 답했다. 그러나 일본 특별고등경찰은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준연은 19282, 3차 조선공산당의 뿌리 뽑는 검거 열풍에 휘말려 체포됐다. 이 일로 송진우도 짧게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럼에도 송진우는 김준연을 탓하지 않았다. 형무소에서 6여 년을 복역하고 19347월 출옥하자 다시 불러내 동아일보주필로 앉혔다. 이유를 따져 묻는 일본 경찰에게 송진우는 그 사람에게 직장을 주지 않으면 낭산은 부득이 상하이나 다른 곳으로 망명하게 될 게 아니오. 그렇게 되면 일본에 던질 폭탄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을 끝까지 신뢰해 준 송진우에게 감동했는지 김준연은 이후 민족주의로 전향한 것은 물론 해방정국에서 한국민주당 그룹의 핵심 멤버가 되어 옛 좌파 동지들에게 저주의 수사를 쏟아내게 된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안재홍을 친일파로 몰아대는 한민당의 여러 격문은 한때 좌익 투사였던 그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김준연은 훗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소련의 공산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영미의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것이 조선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83-85)

 

송진우... “(낭산), 이제 일제는 꼭 망하오. 그런데 저희들이 궁박하게 되면 자치를 미끼로 우리를 유혹할 거요. 형세가 악화돼서 더욱 궁하게 되면 독립을 허여한다고 할 거요. 우리는 자치를 준다고 해서 움직여서도 안되오. 독립을 준다고 해도 응해서는 안되오.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니까.” (86)

 

송진우는 일제가 항복한다고 조급히 나서 경거망동하기보다 역사의 순리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나름 일리있는 판단이지만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는 격동의 상황에서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대응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는 결정적인 선을 지키며 일본 정계 인사나 총독부 당국과 아슬아슬한 시국담을 마다하지 않았던 여운형과는 화해할 수 없는인식의 격차였다. (86)

 

당대 세계 정세와 충칭 임시정부 역량에 대해 송진우가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었다... 매사에 경거망동하지 말라”, “대책은 무대책이라고 말해온 송진우의 지론이 임시정부에 대한 장밋빛 인식에 기초한 것이라면 민족지도자로서 현실 인식 능력에 상당한 결핍이 있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89-90)

 

송진우 자신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그가 몸담았던 동아일보는 식민지배에 개량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 필연적 결과였을까. 송진우 주변의 많은 이들이 1930년대 후반 이후 양심을 꺾고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김성수의 친일... 그의 친일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이라기보다 동아일보와 그가 큰 애정을 기울인 보성전문을 보호하기 위한 강요된 선택에 가까웠다. 조선의 자본가라는 계급적 위치가 김성수를 저항보다는 타협으로 이끈 셈이다. (90-91)

 

송진우는 자신을 찾아온 김준연에게 총독부가 세 번이나 교섭해 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92)

811일 새벽 4, 총독부의 하라다 경무국 사무관(경무과장 하다라 이치로로 추정)이 송진우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 직후 오전 6시 무렵 송진우는 설의식이 전해준 비밀 쪽지를 통해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았다...

이쿠다 기요사부로 경기도지사...

812... 총독부 보안과장 이소자키 히로유키, 전날 송진우를 방문했던 하라다, 조선군 고급참모 간자키 히사시, 그 외 다른 참모(정훈?), 박모(박석윤?)... 혼마치(지금의 명동일대)의 한 일본인 집에서 만났다.

813... 하라다, 조선인 전봉덕(다나카 호도쿠), 경기도 보안과장... 나중엔 이쿠타 지사, 오카 경찰부장도 설득에 합류했다... (93-96)

 

송진우의 요지부동에 총독부 관계자들은 당황했다.

니시히로 경무국장, 오카 경기도 경찰부장 등 총독부 실무진과 송진우와 개인적 인연이 깊던 이쿠타 경기도지사 등은 치안유지에 협력을 구할 조선인 인사로 여운형보다 송진우를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승낙하면 당장 정무총감 엔도에게 가자라는 오카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엔도 등 최종 결정권자의 의향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과 오랜 접촉을 통해 그의 인품과 실력을 알고 있던 엔도는 총독부 실무진의 판단과 별개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은 여운형밖에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96-97)

 

망해가는 놈의 손에서 정권을 받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프랑스의 페텡 정권을 보라. 중국의 왕자오밍 정권을 보라. 또 필리핀의 라우엘 정권을 보라. 그들은 필경 허수아비 정권밖에 되지 못할 것이고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듣게 된다”(송진우의 말)... (98)

 

단파 방송 사건’... 일제 말기 최대 시국사건으로 우사 김규식의 비서로 활동했던 송남헌(1914-2001)과 연관이 되어 있다...

홍익범(1897-1944)은 가깝게 지내던 경신학교 교장인 미국인 에드윈 쿤스로부터 외국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단파 라디오 한 대를 빌렸다... 해외를 향해 뚫려 있던 이 작은 창은 쿤스의 추방과 함께 닫히게 된다. 그러자 이번엔 정동의 경성방송국 기술자들이 움직였다. 경성방송국의 기술자 성기석은 1939년부터 2년에 걸친 노력 끝에 단파 라디오를 스스로 조립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42년 라디오를 통해 김규식 임시정부 부주석을 목소리를 듣는다.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는 사상결찰로 악명 높았던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제1사찰계 주임 사이가 시치로(1898-1945)가 냄새를 맡았다... 19421224일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연보전(현재의 연고전) 중계를 마친 뒤 관수동 국일관에서 송년 파티를 겸한 술자리를 하고 있던 경성방송국 직원들의 회식 자리를 덥쳤다. 뒤이어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었다. 전국에서 350여 명이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홍익범과 조선일보영업국장을 지낸 문석준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60대에 접어든 허헌을 2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며 몸이 크게 상했다. 단파 방송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4210우리말로 된 사전을 만드는 것이 독립운동이라는 어이없는 죄목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 이인은 이 사건으로 옥에 갇혀 해방 직전 풀려났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이어지던 1942-1943년 발생한 두 가지 시국사건으로 조선 내 지도층 인사들의 씨가 마르게 된다. (9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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