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한밤의 전화 – 여운형의 8ㆍ15
장권은 여운형을 성심껏 따르는 핵심 측근 중 하나로, 이 무렵 기독교 청년회 YMCA의 체육부 간사로 재직중이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즉시 동원할 수 있는 많은 체육인과 학생들이 그의 동지이자 부하였다. (28)
홍증식(1895-?)... 192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라는 두 민족지의 영업국장을 지냈던 신문 경영의 귀재이자,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다. (28)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 조선의 1-2대 총독으로 무단정치를 시행하던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 시절 총독부 비서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후 3ㆍ1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된 하세가와 총독과 함께 조선 땅을 떠났다...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1875-1953)... 엔도는 1939년 하반기 아베가 잠시 일본 총리를 맡았을 무렵 한국 직제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내각서기관장(현 관방장관)으로 그를 보필했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해 〈도쿄신문〉 사장으로 재직하다 1944년 7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아베의 부름을 받고 총독부의 ‘넘버2’인 정무총감으로 조선행을 택한 것이다. (29)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1880-1950)은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독려하기 위해선 신망높은 조선인 저명인사를 포섭해 총독부의 시책 홍보에 활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을한은 당시 조선 내 상황에 대해 “33인의 한 사람이던 최린은 이미 변절한 지 오래이고 윤치호도 중추원 참의가 되어 민중의 신망을 잃었”으므로 “몸에 오점이 찍히지 않은 사람으로는” 몽양 여운형과 민세 안재홍 둘 밖에 없었다고 적었다. 여기에 한 명을 더 꼽자면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으로 상징되는 조선 내 자본가 세력을 대표하는 고하 송진우 정도가 있었다. (31-32)
1944년 12월 전황이 불리해지던 때... 안재홍은 여운형과 함께 만난 오카 히사오 경기도 경찰부장에게 겁도 없이 ‘일본은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을 쏟아냈다... 안재홍은 이 만남에서 일본이 퇴각할 경우 지켜야 할 3대 원칙으로 민족자주, 호양협력, 마찰방지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에게 일정 정도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줄 것을 요구했다... 총독부 입장에서도 안재홍의 이 발언은 주목할만한 내용이었다. 일제에 의해 9차례나 옥고를 치른 안재홍이라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입에서 해방이 되면 일본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겠다는 말 대신 ‘유혈방지’와 ‘병존호영’(서로 의존하며 함께 잘 살자는 의미) 같은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41-42)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된 직후인 5월 하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니시히로 다다오 경무국장(한국의 경찰청장)이 여운형과 안재홍을 다시 한번 불러냈다... (민족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 니시히로의 전향적 반응에 난처해진 것은 여운형과 안재홍이었다. 일본이 그들의 요구대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허용한다면... 총독부에 협력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소수 의사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으니 민족대회를 경성에서 소집해 그 결의를 밟지 않고서는 정식으로 공작을 추진할 수 없다”는 새로운 입장을 내세웠다. 총독부의 회유 공작을 역이용해 내선일체를 반대하고 민족자주를 내세우려는 목적이었다. 아무리 전황이 악화되는 중이라 해도 총독부가 민족대회를 열겠다는 두 사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순 없었다... 시국 수습을 위해 여운형과 안재홍을 끌어내려는 총독부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성과가 있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뒤에 수습방안에 대해 양자 사이에 ‘흉금을 터놓는’ 사전의사소통이 이뤄진 것이다. 안재홍이 총독부에 제시한 3대 원칙 가운데 걸림돌은 ‘민족자주’ 뿐이었다. (42-43)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일본이 사면초가에 빠져있음... 1945년 8월 9일 1면...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신병기’를 투하애 시내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이 나오고, 10일치엔 소련군이 소일중립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만주와 조선의 국경을 넘어 물밀 듯 공격을 가해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일제의 감시망도 거세게 옥죄어 오기 시작한다. (43-44)
여운형은 1943년 12월 미ㆍ영ㆍ중 3개국이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킨다”고 밝힌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1944년부터는 경기중학 5학년에 재학중인 손웅이라는 청년이 자체제작한 단파 라디오를 통해 전해오는 정보를 통해 “1945년 5-6월 이후부터 일본이 자기의 선전과 반대로 막대한 타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44)
8월 11일 새벽, 손웅은 여운형에게 “일본이 천황만 그대로 두면 카이로 선언을 받아들이겠다고 미국에 애원했다”는 중대한 소식을 전하게 된다.... 강덕상은 10일 이후 여운형이 보인 여러 재빠른 행동으로 볼 때 그날을 “전후해 조선총독부로부터 내밀한 타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하고 있다. (44-45)
소련의 참전이 알려진 9일 자신을 따르는 건국동맹원들인 이상백, 양재하, 이동화, 이정구, 김세용 등 젊은 학자들을 송규환의 집에 모이게 해 장차 맞이할 해방을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대해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10일엔 이천추를 혜화동에 있는 남상일의 자택으로 불러 친일행적이 없고 독립운동에 공조가 있어 이후 건국과정에서 요긴하게 쓰일 인사들의 명단을 정리할 것을 명했다. (45)
여운형은 11일 이만규에게 연합국이 들어왔을 때 제안할 4대 조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1. 소련의 해방은 연합군의 선전의 결과라고 보아 감사한다. 그런데 조선 민족 자체도 합병 전부터 금일까지 맹렬히 싸워왔다. 조선인 자체의 피 흘린 공이 큰 것을 저들에게 인식시켜 우리 권리를 주장하겠다.
2. 독립정권 수립에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 엄정 중립을 지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해달라.
3. 국내 각 공장 시설은 일본인의 것이라 해서 적산으로 삼으면 안된다. 당연히 조선인의 재산이다.
4. 치안은 조선인에게 맡기라고 주장하겠다. (45-46)
이임수는 여운형을 평생 추종하며 후원했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그는 경성의전 1회 졸업생으로 춘천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조선중앙일보〉 사장이던 여운형과 인연을 맺었다. 여운형과 이임수는 ‘소울메이트’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각별했다. 이란에 따르면 홍천 가라안으로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이임수가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자, 여운형이 90kg이 넘은 거구를 들쳐업고 수십리 산길을 내려왔다고 한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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